역사적 이야기

제46장 -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개혁운동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와 라마크리슈나 미션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1836~1886)는 인도인들에게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준 성자다. 본명은 가다다르 차토파디아이로, 1836년 벵골의 후글리 지역에서 가난한 브라만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엔 뜻이 없었으나 종교적 명상에 몰두했다. 1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캘커타로 갔으며, 형이 죽은 뒤 21세에 캘커타 인근 닥시네스와르의 칼리 사원 제사장이 되었다. 그는 여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아이처럼 굴었고, 24세 때 다섯 살 소녀 샤르다마니와 결혼했으나 부부 관계 없이 평생 어머니로 모셨다.

12년간의 수행과 종교 체험

닥시네스와르 사원에서 12년간 다양한 수행을 쌓았다. 바이라비라는 브라만 수행자에게 2년간 탄트라 수행을 배우고, 바이슈나바즘을 실천하며 크리슈나 신의 직접 현현을 체험했다. 베단타 대승려 토타푸리로부터 베단타 수행을 전수받고, 수피즘과 기독교의 진리도 체험했다. 1876년 이후 그의 영혼은 완전한 만족에 이르렀으며, 종교와 지식이 배움의 대상이 아닌 체험의 대상임을 몸소 증명했다.

그는 라자 람모한 라이나 스와미 다야난다 같은 박학다식한 학자는 아니었으나, 인도 전통 성자 계보의 높은 경지에 오른 구도자였다. 먼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많은 지식인 청년들도 이끌렸다. 브라모 사마지의 아차리아 P.C. 마줌다르는 "라마크리슈나를 만나기 전엔 아무도 종교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겉치레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비로소 참된 종교 생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1886년 8월 16일 결핵으로 입적했으며, 어떤 종파나 아쉬람도 세우지 않았다.

라마크리슈나의 핵심 가르침

  1. 인생의 최고 목표는 신과의 합일이다. 높은 영적 삶을 계발하면 신을 볼 수 있다.
  2. 가정생활은 신 실현의 걸림돌이 아니다. 대상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카마니(여인)'와 '카차나(금전)'에서 마음을 돌려 신에게 바치면 가ृ하스타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3. 육체와 영혼은 별개다. "카마니-카차나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면 육체와 영혼이 코코넛 물이 말라 코프라와 껍질이 분리되듯 분명히 드러난다"고 비유했다.
  4. 논쟁은 무의미하다. 신은 논리의 힘을 넘어선 존재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면 논쟁이 무슨 소용인가.
  5. 우상 숭배를 옹호했다. "법정이 변호사를 보면 의뢰인을 떠올리듯, 조각상을 보면 신이 생각난다"고 설명했다.
  6. 논리, 토론, 언변보다 체험을 중시했다. 지고의 현현은 오직 체험으로만 가능하며, 그 뒤엔 욕망이 소멸한다.
  7. 인간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람은 베갯잇과 같다. 색과 크기, 미추, 성현과 악인이 다르지만, 속엔 모두 같은 솜(진리)이 들어 있다"고 했다.
  8. 박학함과 함께 겸덕을 강조했다. "감자가 구워지면 부드러워지듯, 지혜가 깊어지면 오만함은 사라진다."
  9. 모든 종교는 같은 신에 이르는 다른 길이다. "진리가 하나인데 왜 종교가 많으냐"는 물음에 "주인집 주인은 누군가에게 아버지, 누군가에게 형, 누군가에게 남편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듯 신도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예배받는다"고 답했다.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의 세 가지 위대한 유산

(1) 영적 단순성: 복잡한 베다와 우파니샤드 지식을 쉬운 가르침과 살아있는 본보기로 대중에게 전했다. 힌두교 경전을 알기 쉽게 풀고, 고대 지식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었다. 그는 힌두교 영성의 화신이었다.

(2) 만교일치(萬敎一致)의 신념: 몸소 여러 종교를 실천하며 모든 종교가 신 실현의 다른 길임을 입증했다.

(3) 인류 봉사: 인간 봉사와 선행을 종교라 불렀다. "모든 생명은 주님의 형상이니, 그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 했고, 제자 비베카난다는 이 정신을 '다리드라 나라얀(가난한 자 속의 신)' 봉사로 실천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브라모 사마지나 아리야 사마지보다 더 당당하고 존엄하게 힌두교를 세계에 알렸다. 라자 람모한 라이가 서구 문명 관점에서 힌두교를 변호하는 데 그쳤다면, 스와미 다야난다는 베다의 지식을 펼쳐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판에 맞섰다. 비베카난다는 베단타 전반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힌두교가 서구 종교의 지식보다 우월함을 보였다.

청년 나렌드라에서 스와미 비베카난다로

1863년 1월 12일 캘커타의 두트 가문에서 나렌드라 두트로 태어났다.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고 유럽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에 심취해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루소 등 서양 철학을 깊이 탐구했다. 총명하고 호기심 왕성했던 그는 처음 브라모 사마지에 끌렸으나 영적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친척 권유로 1881년 닥시네스와르 사원에서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를 만났다.

전통 힌두교의 화신인 스승과 서구 교육과 이성을 신봉하던 제자의 만남은 나렌드라의 인생을 바꿨다. 스승 입적 후 여러 제자가 흩어졌으나, 나렌드라는 카슈푸르 인근 바라나가르의 허름한 집에서 동지 3~4명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1887년 이곳이 정식 마타(수도원)로 자리잡았고, 12명이 베다 의식으로 출가하며 이름을 바꿨다. 이때 나렌드라는 '스와미 비베카난다'가 되었다.

시카고 세계종교회의(1893)

인도 전역을 유행하던 중 캬니쿠마리에서 미국 시카고에서 세계종교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1893년 어렵사리 미국에 건너가 힌두교의 밝은 면을 세계 무대에서 전례 없이 효과적으로 알렸다. 세 가지 목적이었다.

  1. 세계 모든 종교가 하나의 종교의 다른 부분임을 알리고 종교적 일체감을 깨운다.
  2. 영어 교육받은 인도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서구 지식인과 부유층도 인도인을 존중하게 만든다.
  3. 바다를 건너고 이방인 음식을 먹으면 종교와 계급이 더럽혀진다는 인도인의 미신을 깨뜨린다.

힌두교 대표로 연단에 선 그는 첫마디 "형제자매 여러분!"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당시 관행인 '동포 여러분'이나 '시민 여러분'과 달리, 전 인류를 영적 형제자매로 부른 그 인사에 장내가 오랫동안 환호했다. 회의 기간 내내 그의 연설은 마지막 순서로 배정되었는데, 청중이 끝까지 남아 경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힌두교의 관용성을 강조하며 "힌두교 사전에 '불관용'이란 단어는 없다. 힌두교의 기초는 착취, 유혈,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선언했다. 베단타의 진리를 펼쳐 보이며, 회의가 끝날 무렵 미국 사회에서 자신과 인도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뉴욕 헤럴드는 "비베카난다는 세계종교회의 최고의 인물이다. 그의 연설을 들으면 저런 박식한 설교자를 파견해 나라를 개화시키려 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된다"고 극찬했다.

이후 3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베단타 강연을 이어가며 힌두교와 인도 문화의 위상을 세웠다. 1896년 2월 뉴욕에 베단타 소사이어티를 설립해 포교 거점으로 삼았다. 많은 미국인 추종자가 생겨 인도 선교사 파견과 미국인 제자의 인도 파견(과학·조직 교육)을 희망했다.

귀국과 라마크리슈나 미션 설립

1897년 5월 귀국해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세우고, 1899년 1월 1일 벨루르에 본부를 두었다. 1899년 6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베단타 소사이어티를 세우고, 파리 종교회의에서도 힌두교를 설파했다. 해외 체류 기간 힌두교를 널리 알렸다.

약 150년간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계 무대에서 힌두교를 비판·폄하해왔으나, 비베카난다가 그 공세를 멈추게 했다. 서구 전 세계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힌두교 강론에 감동하자, 인도인들도 자국 종교와 문화의 자긍심을 되찾기 시작했다.

1900년 유럽 전역을 순회하고 귀국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바라나시로 요양 갔다. 캘커타로 돌아온 뒤 다시 병세가 깊어져 1902년 7월 4일, 만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시인 람다리 싱 '딩카르'는 "영어, 기독교, 유럽 이성이라는 세 힘에서 일어난 폭풍이 히말라야 같은 거목 비베카난다에 부딪혀 되돌아갔다. 힌두 민족의 의무는 비베카난다를 비야사와 발미키처럼 영원히 추모하는 것"이라 썼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종교 개혁

세계종교회의에서 모든 종교의 진리성을 인정했다. 베다뿐 아니라 우파니샤드, 푸라나,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에도 동등한 믿음을 두었다. 무형( निराकार )과 유형( साकार ) 신앙 모두를 포용했다. 종교적 관용·평등·협력을 강조하며, 종교 분쟁의 뿌리를 외적 형식(교리, 의식, 경전, 사원, 교회)에 집착하는 데서 찾았다. 이들은 그저 신 예배의 수단일 뿐이므로 거기에 매몰돼선 안 된다고 했다.

"종교는 인간 내면의 신성(神性)을 발현하는 것이다. 종교는 책에도, 교리에도 있지 않다. 오직 체험 속에 깃든다.…… 사람은 어디서나 쌀을 먹지만, 나라마다 밥 짓는 법이 다르다. 종교도 영혼의 양식이듯 나라마다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로써 모든 종교에 근본적 일치가 있음이 명백하다. 인도는 종교 차별이 없었던 유일한 나라다. 개종은 무익하다. 모든 종교의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인도에서 기독교 포교보다 서구 산업·기술·경제 지식이 더 유익함을 일깨웠다. 인도는 정치적으로 정복당할 수 있어도 문화적으로는 정복당하지 않는다."

그는 힌두 사회에 "힌두 국가는 세계의 스승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각 힌두인은 자국 종교와 문화를 지키되 서구 교육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흥기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베단타 영성으로 인도가 세계를 문화적으로 정복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전통적 베단타 해석(세속 삶 포기하고 명상·삼매로 브라만과 합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속 삶을 등지고 브라만을 만나려 함은 옳지 않다. 진정한 신 예배는 형제 인간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 선언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를 '다리드라 나라얀'이라 부르며 "이웃이 굶주릴 때 사원에 공양 올리는 건 공덕이 아니라 죄악"이라고 일갈했다. 이 선언은 종교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서구 물질주의와 이성주의에 끌려 기독교나 무신론으로 향하던 지식인들이 다시 힌두교로 돌아오게 했다.

"너희는 모든 사람의 사상을 하나로 만들 수 없다. 그건 진리이고 나는 신께 감사한다. 사상 차이와 충돌에서 비로소 새 사상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사회봉사 활동

  1. 인류 봉사 최우선: 교육, 여성 부흥, 경제 발전을 지지하며 보수주의, 미신, 무지를 비판했다.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무지한데, 그들의 세금으로 교육받으면서 그들을 돌보지 않는 자는 매국노"라 일갈했다. 힌두 수행자들에게 편협함을 벗어나 전 인류를 섬기라 촉구했다.
  2. 국민 구원을 위해 지옥도 마다않음: 국가 빈곤 해결이 필수라며 "국민 구원의 거룩한 일을 위해 해탈(모크샤)을 버리고 지옥(나락)에 가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3. 불가촉천민제 반대: 카스트 제도(태어난 신분 차별)를 거부하고, 미신과 불가촉천민제를 신봉하는 수행자와 브라만을 신랄히 비판했다. 신지학회(테오소피컬 소사이어티)와 입장이 달랐는데, 그들이 미신과 탄트라를 조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 영성으로 자아 형성: 사회개혁 자체를 믿지 않았다. "영성으로 자아를 세우면 사회적·경제적 진보가 저절로 따라온다"고 봤다. 영적 고양을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을 진정한 진보로 여겼다.
  5. 조직된 노력 강조: 구제 활동을 위해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세워 다양한 계급·종파·종교가 협력하게 했다. "가난한 이 돕기는 신 성취 길의 제사(야그냐)"라며, 수행자들의 개인 구원(모크샤)보다 사회봉사 이상을 제시한 것이 최대 성과였다.
  6. 인도인 자존감 회복: 서구에서 힌두교의 영적 성취를 알리며 인도인의 열등감을 씻어냈다. 인도인에게 자존심과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그의 위대한 공헌이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와 민족주의 형성

비베카난다는 힌두교와 영성 우위를 입증해 힌두인에게 자긍심과 애국심을 불어넣으며 민족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베단타 해석으로 '각자 내면에서 신의 광명을 볼 수 있으며, 신이 영원히 자유롭듯 개인도 영원히 자유롭다'는 것을 보였다.

서구 정치·제도를 좇는 이들에게 "서구엔 광범위한 불만이 존재하는데, 그곳 제도는 여러 세대 이어져 왔다"고 경고했다. 그가 일으킨 문화적 각성 위에 인도 민족주의의 웅장한 건물이 세워질 수 있었다.

"영적 힘으로 세계를 문화적으로 정복할 수 있으나, 인도가 식민지 쇠사슬에 묶인 한 그 역할을 못 한다. 인도의 정치적 자유는 세계 인류 구원에 필수"라며 정치적 독립 의식을 깨웠다. 바가바드 기타의 카르마요기 크리슈나를 인도 민족의 이상으로 제시했다. 그의 애국심과 사회봉사 이상에서 인도인의 애국심이 새롭게 피어났다.

"인도를 알고 싶다면 비베카난다를 읽어라."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서구에서 비베카난다가 거둔 성공이야말로, 인도가 죽음을 피하려 깨어난 게 아님을 증명한다. 이 힌두 수행자를 한번 본 뒤엔 그와 그의 메시지를 잊기 어렵다." — 마하리시 아로빈도

비베카난다 사후 라마크리슈나 미션이 그의 위업을 계승했다. 영문 월간지 프라부다 바라트(Prabuddha Bharata)와 벵골어 격주간지 우드보다한(Udbodhan)을 발행하고, 수많은 강연·저서를 간행했다. 인도 전역에 지부를 두고 병원, 고아원, 학교, 도서관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