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에 대한 박해라 하면 흔히 전후 인민폴란드 시대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전간기 폴란드 제2공화국 역시 언론의 자유에 아량을 보이지 않았다. 강단에서 '잘못된' 견해를 피력한 사제는 브와디스와프 바호타 신부처럼 불행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1933년 6월 18일, 라크샤바(왕추트군)에서 시작된다. 농민당 지역 활동가들의 주도로 빈센티 비토스의 국회 활동 25주년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고, 축하 행사의 하나로 마을 공용지에서 야외 미사가 봉헌되었다. 이때 본당 주임인 브와디스와프 바호타 몬시뇰이 설교를 맡았다.
빈센티 비토스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설교 내용은 폴란드의 상황과 관련된 것이었고, 힘 있게, 다소 열정적으로 전달되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사탄이 누구인지는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사탄'은 유제프 피우수프스키와 산치아 진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라크샤바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는 빈센티 비토스.
때가 나쁜 설교
만약 바호타 신부가 몇 달이라도 일찍 혹은 늦게 설교했다면 불쾌한 후폭풍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당시 폴란드 남부와 동부를 뒤흔들던 강렬한 농민 시위와 정확히 겹쳤다.
상황은 극도로 긴장되어 경찰과 군대는 여러 차례 발포까지 하며 군중을 해산시켜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국은 반항적인 성직자가 추가 행동에 나설 것을 우려해 그를 제어하기로 했다.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선택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오래되고 검증된 방식, 즉 형사 사건이었다.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불운한 설교 단 나흘 만에 바호타 신부는 '공공의 불안을 조장할 수 있는 메시지를 유포하여 정부와 국가를 모욕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라크샤바 주민들의 저항이 우려되었던지, 비토스의 회고에 따르면 보병 중대 하나와 경찰관 150명이 마을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반항적인 사제에 대한 탄압은 인민폴란드만의 일이 아니었다. 제2공화국에서도 집권자를 비판한 성직자는 불쾌한 결과를 각오해야 했다. (RK 컬러화)
체포된 신부는 강한 호위를 받으며 제슈프 구치소로 이송되었고, 이후 크라쿠프 감옥으로 옮겨졌다. 제2공화국의 재판도 오늘날처럼 그리 빠르지 않았던 탓에 바호타 신부는 철창 안에서 거의 넉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그는 본당 주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세 차례 총리를 지낸 비토스의 회고에 따르면, 이 결정은 교회 계층이 권력층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신부 변호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복 입은 '범죄자', 법정에 서다
마침내 10월 19일 오전 9시, 왕추트 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에는 엄청난 관심이 쏠렸다. 지역 농민들이 대거 몰려왔으나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각지 신문사의 특파원들이 법정에 자리해 공방 과정을 취재했다.
바호타 신부에게는 형법 제127조와 제170조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어떤 조항이었을까?
제127조는 이렇다.
"공무 또는 공공 활동 장소나 시간에 권위, 관청, 육군, 해군 또는 그 부대를 모욕한 자는 2년 이하의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제170조는 다음과 같다.
"허위 소식을 공공연히 유포하여 사회적 불안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형과 벌금형에 처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혐의였다. 형량이 합산되면 철창 생활 최대 4년에 금전 처분까지 더해질 수 있었다.

1932년 마카레비치 형법은 바호타 신부에게 적용된 혐의들에 대해 최대 4년의 구류를 규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핵심이 등장한다. 바호타 신부는 설교에서 대체 어떻게 '권위를 모욕'하고 '허위 소식을 유포'했단 말인가? 공판에서 검사는 신부가 말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정부와 유제프 피우수프스키 개인을 공격하는 정치 연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
신부 쪽은 자신의 말이 '새 설교자 문고'에 실린 테오도로비츠 대주교의 설교 중 하나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피고 심문이 끝나자 왕추트 지구 경찰서장 노바코프스키 경감이 증언대에 섰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듯 그는 피고에게 적대적이었다. 순경 담브로프스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몇 명의 증인이 더 소환되었지만, 사건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는 못했다.
모든 증언이 끝난 뒤 피고 측 변호인은 바호타 신부의 말을 해석할 전문가로 중진 설교자 한 사람을 증인으로 소환해 달라고 신청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레흐 사제 몬시뇰을 지정했고, 재판은 11월 9일로 연기되었다.
징역 7개월과 벌금 1000즐로티
그러나 변호 측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법원은 무자비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판에서 신부는 제127조 위반으로 징역 5개월, 제170조 위반으로 징역 2개월과 벌금 1000즐로티를 선고받았다.

전 폴란드를 뒤흔든 스캔들! 1933년 10월 20일자 바르샤바 일간지 '노비니 코지엔네'는 바호타 신부 사건을 1면에 실었다.
형량이 합산되면서 바호타 신부는 7개월을 철창에서 보내야 했고, 물론 고액의 벌금도 납부해야 했다. 참고로 당시 폴란드군 소위의 월급이 281즐로티로, 그것도 높은 편에 속하는 봉급이었다. 다행히 미결 구금 기간이 형에 산입된 것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물론 변호 측은 항소했지만 소용없었고, 신부는 원하든 원치 않든 형기를 마쳐야 했다. 출옥 후 그는 2년간 무직으로 지냈으며, 1935년 8월 16일에야 비에트르즈노(Wietrzno)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십수 개월 뒤인 1936년 10월 9일 직무에서 해임되어 조기 은퇴길에 올랐다. 그리고 1939년 6월 22일, 50세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불편한 옥중 생활이 그의 조기 사망에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 문헌
- Wincenty Witos, 『나의 회고(My memories)』 2권, Ludowa Spółdzielnia Wydawnicza, 1990.
- 『노비니 코지엔네(Nowiny Codzienne)』, 1933년.
- Marian Skowyra, 『브와디스와프 바호타 신부, 스트자우코비체의 엄격한 사제 1889–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