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3일, 종교가 폴란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문이 아니라 '뒷문'을 통해 성급하게 이루어졌고, 그 도입 절차 자체가 종교 교육의 재등장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충격과 논란을 낳았습니다.
원탁회의 이후 종교가 학교로 돌아올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전쟁 직전과 직후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압력은 막대했고, 교회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학교에 종교를 도입하는 일은 낙태 금지와 여러 물질적 문제들과 함께, 교회가 국가와 시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주교단 전략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반면 집권 세력 내부에서는 개혁 과정에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촉발하고 싶지 않다는 저항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종교 수업에 담긴 진정성"
교회는 압박과 기정사실화라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정부와의 협의 없이 공개적으로 학교 종교 교육 도입을 요구한 것입니다.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총리가 훗날 회상하기로, 그는 주교들과 프리마스 본인으로부터 학기 시작 전에 종교 수업을 도입하라는 압박의 전화를 수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마조비에츠키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는 학교 종교 교육이 오히려 교회를 해칠 것이라 믿었고, "종교 수업에 임하는 진정성"이 사라질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공세를 받던 마조비에츠키 정부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마조비에츠키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지지, 그리고 다가오는 대선에서 자신의 후보 지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리 역시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조비에츠키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지지와 함께 다가오는 대선에서의 지지를 기대했습니다.
7월, 정부와 폴란드 주교회의 공동 소위원회는 종교를 의무가 아닌 선택 과목으로 하되 사제들이 가르치는 형태로 학교에 복귀시키기로 했습니다. 곧이어 8월 30일, 당시 교육부 장관 헨리크 삼소노비치 교수는 마조비에츠키 총리와의 협의 끝에 종교 수업의 학교 복귀를 규정하는 지침을 발표했습니다. 이 지침에는 교리교사(캐테키스트)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공론화 과정은 전혀 없었고, 전체 절차는 국회를 우회했습니다. 당시 시민권익옴부스만이었던 에바 웽톱스카 교수에 따르면 정부는 헌법과 교사헌장을 위반했으며, 웽톱스카는 헌법재판소에 이의신청을 제기했습니다.
국가의 세속성에 대한 우려
마조비에츠키 정부의 결정은 여론을 분열시켰습니다. 사회 일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관심하게 받아들였지만, 종교의 학교 도입 방식을 비판하면서 국가의 세속성 훼손, 그리고 한 지배 세력이 다른 지배 세력으로 대체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피오트르 파체비치가 『가제타 비보르차』에 기고한 논평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마조비에츠키 총리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학교 종교 교육) 문제는 국회에서도, 정부 심의에서도, 하물며 국민투표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결정은 반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소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방식은 공개되지 않았다), 논거도 공개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언론, 가톨릭 언론을 포함한 논의도 참고되지 않았다. 나아가 1989년 5월의 국가-교회 관계법과 그때까지 시행 중이던 헌법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재판관들은 교육부가 종교 교육을 위해 학교 시설만 제공했다는 이유로, 국가와 교회의 분리 원칙이 침해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대학과 폴란드과학아카데미(PAN)의 교수들도 학교 종교 교육에 관한 입장에서 유사한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 요구는 부교육부장관 안나 라지비우가 상당히 기괴한 논리로 거부했습니다. "(...) 결과가 어떻든(국민투표 – 역주) 소수에게 상처를 주고 다수의 의사를 강요할 것이며, 지금처럼 부모와 아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종교 교육을 학교에 도입한 교육부 장관의 지침이 헌법에 합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관들은 교육부가 종교 교육을 위해 학교 교실만 제공했다는 이유로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침해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교리교사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같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관 12명 각각이 어떻게 표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3명은 반대 의견을 내며 이러한 결정은 오직 국회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헌법재판소, 이의신청 기각
1992년에는 새 교육부장관 안제이 스텔마호프스키가 학교 종교 교육의 조건과 조직 방식에 관한 명령을 발표했습니다. 옴부스만의 견해로는 이 규정이 세속 국가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지만, 헌법재판소는 신청을 전부 기각했습니다.
학교 종교와 관련된 논란은 교리교육의 조직 방식에 대해서도 제기되었습니다.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지고 교리교사의 급여가 공적 자금으로 지급됨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교육 내용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교리교사는 교장이나 교사협의회가 아니라 본당 사제에게 복종합니다.
주교들은 대선에서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레흐 바웬사가 더 가까웠습니다.
결국 1997년 헌법은 타인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붙여 학교 종교 교육을 허용했습니다.
주교들은 대선에서 마조비에츠키를 지지하지 않았고, 바웬사가 그들에게 더 가까웠습니다. 대선 이후 마조비에츠키 정부는 총사퇴했습니다. 이처럼 기괴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학교 종교 교육 도입은 가톨릭 교회가 사회 생활 전반을 자기 통제 아래 두는 데 중요한 단계였으며, 세속 국가의 수많은 항복 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종교를 학교에서 빼내고 그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자는 주장은 점점 더 많은 폴란드인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