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 문명은 매년 수천 명의 포로를 신에게 바치는 대규모 인신공양을 자행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공양된 시체의 일부를 잡아먹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집에는 큰 솥과 항아리, 물독이 가득했는데, 그 안에서 불쌍한 인디언들의 고기를 삶았다. 그들은 제물로 바쳐진 뒤 파파스[사제]들에게 잡아먹혔다. 희생 장소 근처에는 도살장에서 고기를 자르는 데 쓰이는 커다란 칼들과 나무 받침대가 많이 놓여 있었다. (...) 나는 늘 이 건물을 지옥이라 불렀다."
멕시코 정복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의 저자이자 스페인 출신 정복자인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íaz del Castillo)가 아즈텍 신전을 방문하고 남긴 생생한 묘사입니다. 그것도 평범한 신전이 아니라, 아즈텍의 수호신 위츠일로포치틀리(Huitzilopochtli)를 모시던 신전이었습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 멕시코 사람들이 실제로 엄청난 규모의 인신공양을 행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대신전 봉헌식 같은 특별한 의식에서는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포로가 제물로 바쳐졌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거의 확실히 과장된 것이지만, 어쨌든 매년 수천 명이 신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희생자의 시체 일부가 이후 잡아먹혔다는 사실입니다.
기아가 부른 식인?
그렇다면 왜, 어떤 목적으로 식인이 이루어졌을까요? 이 질문에 흥미로운 답을 내놓은 이가 바로 1977년 논문 「아즈텍 희생의 생태학적 기반」을 발표한 마이클 하너(Michael Harner)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희생된 포로의 시체를 먹는 것은 아즈텍인의 식단에서 부족한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너는 중앙아메리카에는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화할 초식 포유류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이는 타당한 지적입니다). 남은 것은 이런 면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칠면조와 개였는데, 개 역시 고기를 먹여야 했기에 인간과 같은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했습니다. 야생 동물만으로는 인구 밀집 지역에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사진: 후안 데 토바르(Juan de Tovar) / 퍼블릭 도메인 — 콜럼버스 이전 시대 멕시코 주민들은 실제로 엄청난 규모로 인신공양을 했다
또 하나의 근거는 희생의 규모에서 나옵니다. 하너에 따르면 연간 25만 명, 즉 중앙 멕시코 인구의 약 1%가 제물로 바쳐졌으며, 인육은 식단의 필수 요소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피비린내 나는 의식의 횟수는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함께 증가했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전통적인 숙적이던 틀락스칼란(Tlaxcallan)과 이른바 '꽃의 전쟁'까지 벌였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오로지 희생용 포로를 포획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로 수에 따라 매겨지는 화려한 의식과 전사 서열 체계는 모두 인육에서 단백질과 지방을 얻어야 할 필요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반론이 있다
확실히 파격적이고 설득력 있는 가설이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앙 멕시코 사람들은 단백질과 지방이 결핍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당시 가장 인구 밀집 지역은 광대한 호수 체계, 그중에서도 가장 큰 텍스코코(Texcoco) 호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호수는 물샐, 물고기, 양서류를 풍부하게 제공했고, 훌륭하면서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즈텍 식단의 기본은 옥수수와 콩이었고, 이 두 가지만으로도 필요한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극심한 흉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1450~1454년 멕시코 계곡의 기근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을 음식과 맞바꾸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는 만성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중심부는 정복한 영토에서 곡물 형태의 공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멕시코 계곡으로 운반된 옥수수, 콩, 아마란스, 치아는 연간 6만~15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이었다고 추산됩니다.
희생된 불행한 이들의 시체는 통째로 먹히지 않았다
하너의 가설에 반박하는 또 다른 논거도 있습니다. 전쟁은 보통 수확이 끝난 뒤, 곳간이 가득 찰 때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포로가 양질의 식량 공급원이라면 이런 시기 선택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희생된 이들의 시체는 통째로 먹히지 않았습니다. 식인 잔치에서는 다리와 팔만이 먹혔고, 나머지 몸은 왕립 동물원의 짐승이나 개들에게 던져졌으며, 머리는 '솜판틀리(tzompantli)'라 불리는 특수한 대(臺)에 전시되었습니다. 만약 시체가 단백질과 지방의 원천이었다면 통째로 먹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소수만 누리던 특별한 잔치
아즈텍 사회는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인육이 나오는 잔치에는 거의 예외 없이 귀족들만 참석했습니다. 평민 전사는 전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경우에만 이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인육의 대부분은 어차피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여건에 있던 사람들의 배로 들어갔던 셈입니다. 하너도 이 문제를 인지했지만, '특별한 식사'라는 전망이 평범한 전사들이 전장에서 더욱 분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라고 해석했습니다.
인육이 나오는 잔치에는 거의 귀족들만 참석했다
솔직히 말해 이 논거는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게다가 영양소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집단은 아동과 청소년인데, 이들 사이에서는 식인 풍습이 전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하너가 식인과 인신공양의 규모와 관련된 수치를 꽤 안이하게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언급한 연간 25만 명의 희생자는 대다수 연구자들이 받아들이는 수치보다 훨씬 많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연간 2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모든 시체가 먹힌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즈텍은 왜 인신공양을 했을까?
그렇다면 이토록 대규모의 희생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가장 유력한 답은 정치입니다. 희생된 포로들은 정복된 속주에서 잡혀왔습니다. 즉, 속주들이 전사를 잃을수록 반란의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희생 의식은 또한 거대한 볼거리이기도 했습니다. 불행한 포로들이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면, 사제들이 그들의 심장을 적출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은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의 백성과 초청된 손님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제국 선전이었던 셈입니다. 아주 특별한 형태의 선전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