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촬영술의 콜럼버스, '루미에르 형제의 세 번째 형제', 그리고 최초의 영화 제작자로 불린 카지미에시 프로신스키(Kazimierz Prószyński)는 평생을 카메라를 만들고 개선하는 데 바쳤습니다.
카지미에시 프로신스키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도 폴란드의 발명가들은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피오트르 레비엔진스키(Piotr Lebiedziński)는 자신이 설계한 장치를 끊임없이 개선하고 있었고, 프로신스키가 성인이 되기 무렵에는 이미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사실 움직이는 사진, 즉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가 있지만, 창의성이라는 면에서 폴란드의 발명가들이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무거운 카메라와 벗은 여인들
레비엔진스키의 장치는 당시 카메라의 고질적인 골칫거리였던 유리 건판을 사용했습니다. 유리판은 가볍지도, 튼튼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필름을 되감기 위해 손으로 크랭크를 돌려야 하는 수고까지 더하면, 엄청난 체력과 강철 같은 신경, 그리고 놀라운 정밀함을 요구하는 장비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도 영화 예술의 개척자들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레비엔진스키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촬영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기록 중에는 꽤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19세기의 이 필름에는 긴장한 듯한 남자와 나체의 여인이 함께 등장합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이 찾은 장소 목록에는 욕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폴란드 최초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 네 컷의 프레임
레비엔진스키의 카메라는 촬영과 상영을 모두 할 수 있는 장치였습니다. 두 개의 렌즈를 활용해 당시 장비의 고질병이었던 화면 흔들림 문제를 크게 완화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또 다른 발명가 얀 포플라프스키(Jan Popławski)가 '만능 조오스코프'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등유램프를 사용해 투사 화질을 개선했고, 현미경 렌즈 덕분에 극도로 어두운 환경에서도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리 건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무겁고 깨지기 쉬울뿐더러 크랭크로 감아야 하는 불편함도 그대로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신스키가 무대에 등장합니다.
말 위에서 카메라를 들다
발명가 프로신스키는 1875년 4월 4일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그는 부모의 권유로 벨기에의 공과대학에 유학을 떠났고, 재학 중이던 시절에 첫 번째 '플레오그래프(pleograph)'를 설계했습니다. 그는 작업을 완성하고 1894년 특허를 취득했는데, 이는 뤼미에르 형제의 특허가 공표되기 거의 1년 전이었습니다.
상영 기술의 역사에서 세계는 프로신스키에게 '셔터(obturator)'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화면의 깜빡임을 없애주는 투사용 셔터였습니다.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필름 셔터가 도입되기 전에는 편안하게 영화를 관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신흥 예술 '열 번째 뮤즈'의 애호가들은 심한 눈부심과 두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1908년에도 상영 시간은 최대 15분에 불과했습니다. 필름 한 롤의 길이가 짧았던 것도 이유지만, 관객의 눈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6년도 지나지 않아 몇몇 영화는 몇 시간 분량으로 늘어났습니다. 셔터가 없었다면 장편 영화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에어로스코프를 들고 파리의 거리를 촬영하는 카지미에시 프로신스키
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따로 있었습니다. 프로신스키는 무엇을 이뤄냈을까요? 발명가의 회고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료는 반드시 가벼운 필름 테이프여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이 얇은 막을 찢지 않으면서 빠르고 정확하게 넘겨주는 메커니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테이프의 구멍에 물려 빠르게 움직이는 이빨과 레이크(rake)로 이루어진 온전한 시스템을 고안했습니다." 플레오그래프, 개선된 비플레오그래프(biopleograph), 그리고 이후의 에어로스코프(aeroscope)가 모두 이 원리로 작동했습니다.
특히 에어로스코프는 기자와 다큐멘터리 촬영기자들 사이에서 진짜 히트작이 되었습니다. 크랭크를 없애고(기구가 압축 공기로 구동됨) 뛰어난 화면 안정성을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프로신스키는 스스로 움직이면서 도시의 거리를 촬영했습니다. 파리에서는 말이 끄는 마차 위에서 도시를 담아냈고, 런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말등에 올라타 촬영에 나섰습니다.
수감번호 129957
당시 시대 자체가 평온하지 않았던 데다, 발명가 본인도 차분한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바르샤바, 벨기에, 영국, 프랑스 사이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집어삼키자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소리와 영상을 결합한 영화 시스템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이 발명품은 시장에 선보이지 못했고, 프로신스키는 아무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베끼지 못하도록 현존하는 모든 사본을 직접 파괴해 버렸습니다.

1899년 6월 23일 열린 비플레오그래프 시연회
그러나 그는 애국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스스로도 애국자였습니다. 폴란드가 독립을 회복한 지 1년 후 그는 바르샤바로 돌아와 카메라 양산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희망은 재정난, 그리고 이어진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프로신스키는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슈타포는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않았고, 1944년은 발명가에게 훨씬 잔혹한 해였습니다. 그해 8월 25일, 계속되고 있던 바르샤바 봉기 중에 그는 두 번째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그로스로젠(Gross-Rosen)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나중에는 마우트하우젠구젠(Mauthausen-Gusen)으로 옮겨져 수감번호 129957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이 발명가의 마지막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1945년 3월 13일, 일흔 번째 생일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 그리고 수용소 해방을 두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처:
- Janicki S., Polish film yesterday and today, Warsaw 1982.
- Jewsiewicki W., Kazimierz Prószyński, Warsaw 1974.
- Kazimierz Prószyński - genius no. 129957 (2008), dir. Paduch B.
- Talbot F. A., Practical Cinematography and its Applications, London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