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로 우주에 간 사람

세계를 뒤흔든 108분의 비행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세계를 놀라게 하며 최초의 인간을 우주로 보냈습니다. 주인공은 당시 27세의 젊은 조종사 유리 가가린이었습니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팽팽하게 맞서던 냉전기 우주 경쟁에서 소련이 거둔 화려한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오전 9시 22분, 알류샨 열도에 배치된 미군 레이더가 소련 우주선이 발신하는 무선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단 5분 후, 소련이 인간을 궤도에 올렸다는 암호화된 메시지가 펜타곤에 전해졌습니다.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이는 상급 중위 출신 조종사 유리 가가린으로, 그는 오전 9시 6분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를 떠나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총 108분간 궤도를 비행한 뒤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평범한 소련 소년

훗날 우주 비행사가 될 가가린은 1934년 3월 9일 스몰렌스크 지방의 콜호스(집단농장)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유리에게는 두 명의 형과 누나가 있었습니다. 가가린 가족은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었고, 종전 후 모두 그자츠크 시로 이주했습니다. 이 도시는 훗날 유리의 우주비행을 기념해 '가가린'으로 개명됩니다.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로 우주에 간 사람

1949년, 15세의 유라(유리의 애칭)는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직업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고, 결국 오렌부르크 항공학교에 진학해 1957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무르만스크 지방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는데, 그곳은 산악 지형과 극야, 잦은 눈보라가 일상인 혹독한 북극권 환경이었습니다. 가가린은 미그-15 전투기를 몰며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비행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로 우주에 간 사람

1957년 10월 스푸트니크 1호 발사와 1959년 9월 루나 2호의 달 도달 성공은 가가린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아내 발렌티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다르게 살아야 해. 세상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일들을 피하고 있는 것 같아." 밤에는 지휘부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우주 연구의 발전과 관련하여 (...) 우주 비행 후보자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준비 과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저의 간절한 소망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치열했던 우주인 선발 과정

유리는 자신의 후보 지원이 이미 검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절차가 철저히 기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주 프로그램 총괄이자 보스토크 1호 설계자인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전투기 조종사가 가장 적합한 후보라고 판단했습니다. 조종사 직업 자체가 숙련된 기량, 빠른 판단력, 그리고 비행 중 극심한 중력 가속도를 견디는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 역시 조종사들이 건강 상태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에서 이 선택에 동의했습니다.

당국은 각 군 주둔지 사령관들에게 가장 유망한 전투기 조종사를 선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의사들이 부대를 방문해 선발된 3,500명의 군인 병력 기록을 검토했습니다. 1차 선발에서 2,800명이 탈락했고, 2차 면담 단계에서 700여 명의 조종사가 탈락했습니다. 또한 300명은 우주 프로젝트 참여 여부를 며칠 동안 신중히 고민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로 우주에 간 사람

중앙항공병원에서 40일간의 검진을 통과한 400명의 장교가 최종 단계에 올랐습니다. 후보들은 전 분과 의사들의 검진을 받았고, 중력 가속도 시험용 원심분리기와 저압 챔버(바로카메라)에서 시험을 거쳤으며, 심리학자들도 이들을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가가린에 대해 내린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팀 게임에서 그는 주장이자 리더의 역할을 맡으며,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다 (...). 즐겨 쓰는 말은 '일하다'이다 (...). 군사 훈련은 그에게 즐거움이다 (...). 정직하고, 솔직하며, 예의 바르고, 사려 깊고, 단정하며, 시간을 엄수한다. 높은 지적 수준과 (...)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었다. (...) 일관성이 있다. 옳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견해를 망설임 없이 옹호한다."

가가린은 모든 시험을 통과했고, 1960년 1월 우주비행을 준비하는 20명의 조종사 그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같은 시기,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는 우주인 양성 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조종사들은 우주선 모형 훈련, 높은 중력 가속도 견디기, 장기 고립 생활 등 추가 시험을 치렀습니다. 1년 동안 14명의 후보가 탈락했습니다.

1961년 1월, 마지막으로 남은 6명이 국가위원회 앞에서 최종 시험을 치렀습니다. 시험은 우주선 시뮬레이터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로켓을 정상 비행 모드로 조종하고, 비상 상황에 신속히 대응하고, 지휘부에 보고하며, 기체 내외부 상황을 묘사하는 등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에 나갈 인물로 결정되었습니다. 왜일까요? 군 의관 니콜라이 구로프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유리가 남다른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이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영광과 비극

로켓 발사일이 4월 12일로 정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련 정보당국에 따르면 미국이 4월 20일에 자국 우주선을 발사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입수된 것입니다. 발사 이틀 전, 가가린과 코롤료프는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4월 12일, 우주인이 이미 우주복을 갖춰 입은 상태에서 한 기술자가 유리의 우주복에는 국적을 나타내는 표식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해외에 착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누군가 붉은 페인트 한 통을 가져와 가가린의 헬멧에 'СССР'(소련)이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로 우주에 간 사람

보스토크 1호의 비행은 순조로웠고, 유리는 계획대로 착륙했습니다. 소련 국민은 물론 전 세계가 가가린에 열광했습니다.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이탈리아 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우주인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소련 뉴스릴에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배우가 유리의 뺨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2년 동안 가가린은 미국, 폴란드, 쿠바, 프랑스, 캐나다, 불가리아 등 30개국 이상을 방문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인파가 그를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가가린은 공식 외교 행사 임무에 지쳐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활동, 즉 비행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 일찍 끝났습니다. 1968년 3월 27일, 가가린은 훈련 비행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는 겨우 34세였습니다. 소련 당국은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유리는 3월 30일 소련의 가장 공훈 있는 인사들이 안장되는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가가린의 유해가 담긴 관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인사들이 운구했으며,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참고 문헌

  1. Wiernicka V., Secrets of the Country of Soviets, Łódź, 2020.
  2. Первушин А.И., Юрий Гагарин. Первый полет в документах и воспоминаниях, Москва, 2014.
  3. Гагарин, 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https://tass.ru/encyclopedia/person/gagarin-yuriy-alekseev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