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점령군의 각종 탄압으로 피해를 입은 폴란드 마을과 취락은 1만 곳이 넘는다. 900곳이 넘는 지역에서 독일 치안부대는 주민 수 명에서 수백 명을 학살했다. 총독부(Generalgouvernement) 관할 구역과 비아위스토크(Białystok) 지역에서만 440개가 넘는 마을이 '진정 작전'의 대상이 되었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침략자에 맞섰던 폴란드 농촌
점령군에 맞선 투쟁을 떠올릴 때 우리는 무심코 바르샤바 봉기와 지하 저항 조직의 무장 활동, 게릴라 교전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폴란드 농촌 역시 어마어마한 규모로 독일군에 저항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쉽게 잊히곤 한다.
폴란드 지하 저항 세력 중 두 번째로 강한 무장 조직이었던 '농민 대대'는 바로 농촌에서 태어났다. 시골은 폴란드군 부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들, 국내군(AK) 장병들, 그리고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인 인민근위대와 인민군에게 은신처와 보급품을 제공했다. 그리고 폴란드 농촌은 이러한 희생에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각종 탄압을 당한 취락은 1만 곳이 넘으며, 900여 곳에서 독일 치안부대가 주민들을 학살했다. 총독부와 비아위스토크 지역의 440개 이상 마을이 진정 작전을 당했고, 그 절반 이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특히 1942년 중반부터 1944년 중반까지 단 2년 동안만 독일군은 진정 작전 과정에서 약 5만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했다. 대부분은 파르티잔 부대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루블린과 키엘체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독일군의 첫 보복 작전은 헨리크 도브란스키 '후발(Hubal)' 소령 부대의 활동에 대한 응징으로 시작되었다.
'후발'에 대한 보복
점령 폴란드에서 벌어진 첫 번째 진정 작전은 분견된 폴란드군 부대를 이끌던 헨리크 도브란스키 '후발' 소령의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되었다. 조국이 함락된 뒤에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광인 소령'으로 불린 그는 콘스키에(Końskie), 오포츠노(Opoczno), 술레유프(Sulejów) 사이의 시비엥토크시스카 숲에서 부대를 이끌며 활동했다. 식량과 수공예 서비스, 필요할 때면 잠자리까지 제공하던 현지 농민들의 지원을 받은 이 분견대는 여러 소규모 교전에서 독일군을 괴롭히며 승리를 거두었다.
점령군은 이 '광인 소령' 부대를 추적하는 데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규모는 무려 5천~8천 명에 달하는 국방군과 SS 병력이었다. '후발'이 활동하던 지역에 대한 진정 작전은 1940년 3월 30일 시작되었다. 4월 11일까지 독일군의 잔혹한 행적으로 31개 폴란드 마을이 유린당했고, 712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수백 명이, 흔히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체포되어 강제 노동 수용소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독일의 보복은 아다무프, 가우키 크슈조노프스키에, 후치스코, 크롤레비에츠, 메흘린, 마와후프, 피에코워, 스미쿠프, 스타드니차 볼라, 스테판쿠프, 샤와스 스타리 등의 마을을 덮쳤다. 그러나 침략자들이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곳은 스코비(Skłoby) 마을이었다.
"멈춰라! 폴란드 도적들!"
1940년 4월 11일 밤, 스코비 마을은 독일 경찰과 자위단(Selfschutz)의 빈틈없는 포위망에 갇혔다. 마을 주민들은 곧 진정 작전이 있으리라는 소문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여전히 부활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라우스(나가라)", "슈넬(빨리)"을 외치며 총개로 주민들을 때려 마을을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 일부는 미리 준비해 둔 은신처, 즉 거름 더미 밑이나 지하실, 건물 다락방으로 몸을 숨겼다. 또 다른 이들은 여장을 하고서라도 마을에서 도망치려 했다. 독일인들은 스스로 몇몇 농민을 풀어주며 최대한 빨리 떠나라고 하고 배치된 순찰대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점령군은 붙잡은 폴란드인들을 인근 흐레비스카(Chlewiska)의 학교 건물에 가뒀다. 그곳에서 열린 이른바 '재판'에서 모인 농민들은 '후발' 부대를 도운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통보받았다. 흥미롭게도 독일인 통역관은 미리 키가 작고 어린 폴란드인들에게 자신이 14살이라고 말하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훗날 밝혀졌듯, 체포자들은 연령별로 분류되었고 15세에서 65세 사이의 남성들이 처형 대상이 되었다.

처형 장소 두 곳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무덤은 스테판쿠프 마을 근처 숲속과 주추프(Rzuców) 근처 연못 일대에 팠다. 처형 대상으로 선발된 이들 중 한 명인 얀 피에트라스(Jan Pietras)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열 명을 데려가 차에 실었다. 호송은 헌병 넷이 맡았다. 그 과정 내내 독일인들의 욕설과 모욕, 총개로 내리치는 구타가 따랐다. 우리는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지 못했다. 차가 출발해 우리를 주추프 근처 숲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내렸다(…). 우리에게도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 우리를 두 줄 종대로 세웠다. 독일인 둘은 뒤에, 둘은 앞에 섰다. 우리는 이렇게 1킬로미터쯤 걸었다. 그러더니 우리를 멈춰 세우고 주추프 쪽을 바라보라고 했다."
"나는 이 종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호송병들이 멈춰 서서, 곧 우리를 쏘게 될 기다리던 자들에게 휘파람을 보냈다. 시키는 대로 주추프를 바라보려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나는 몇 미터 앞에 펼쳐진 노란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할 정도의 힘이 나를 밀어붙였다. 남다른 희망이 내 안에 들어왔다. 호송하던 슈바벤들에게서 보드카 냄새가 났다. 나는 이것이 아마 '세상의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할트! 할트! 폴니셰 반디텐!(멈춰라! 멈춰라! 폴란드 도적들!)' 하는 외침이 들렸고, 기관총 소리도 들렸다. 나는 외침에도 총알에도 반응하지 않고, 이 지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미친 듯이 숲속으로 달렸다.(…)"

스코비에서 독일군은 마을 주민 216명을 학살했다. 일부 자료는 희생자를 265명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사진은 1960년대 스코비 묘지에서 열린 추모식이다.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아팠고, 독일인의 '할트!' 외침과 총알 소리가 귓가에 계속 울렸다. 그리고 저 숲속에서는 내 동포들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총성을 계속 들었다."
그날 독일군은 스코비 마을의 남자 216명을 총살했고, 일부 자료는 그 숫자가 265명에 이른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마을의 비극의 끝이 아니었다. 마을에 불이 질러져 거의 모든 건물이 재가 되었다. 타닥거리는 잿더미 위에는 노인들과 절망에 빠진 여인들, 우는 아이들만 남았다.
옷을 찢어 벗기고, 신발을 벗긴 뒤 굵은 몽둥이로 내려쳤다
독일 기관은 각종 밀정을 동원해 예방 차원의 작전도 벌였다. 1943년 봄, 인근 스타라호비체(Starachowice) 출신의 가죽 장수 '기에라다(Gierada)'라는 남자가 고두프(Godów)라는 더 큰 마을에 속한 겐비체(Gębice)와 주호비에츠(Żuchowiec) 두 취락 근처에 나타났다. 특히 손상된 신발을 수선할 가죽이 절실했던 터라 이 남자는 주민들에게 반가운 손님이었다. 사람들은 또한 그가 언제든 나눠주던 군사 작전과 파르티잔에 관한 정보에도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어느 날 기에라다는 무장한 사내 몇 명과 함께 나타났다. 이들은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파르티잔 노래를 부르면서 농민들에게 산속 부대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몇몇 지원자가 실제로 나섰고, 사내들은 곧 다시 나타나 그들을 게릴라 부대에 편입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5월 24일 밤, 두 취락은 독일 헌병대에게 포위되었다. 외침과 총개질 속에 독일인들은 농민들을 집에서 쫓아낸 뒤 집에 불을 질렀다. 일부 불탄 건물 안에는 아직 가족들이 남아 있었다. 점령군은 남자들을 인근의 오래된 광산으로 몰아붙이면서 그들의 가장 값진 물건들을 약탈했다.
진정 작전을 지휘하던 독일 장교는 특히 얀 수르마(Jan Surma)가 신고 있던 새 신발과 새 옷이 눈에 들어왔다. 이 소년은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부하자 고문관들은 그를 힘으로 바닥에 쓰러뜨리고, 옷을 찢어 벗기고, 신발을 벗긴 뒤 굵은 몽둥이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구타했다. 그중 한 명은 군화를 신은 무거운 부츠로 소년의 목을 짓밟아 질식시켰고, 확실히 하기 위해 머리에 한 발을 더 쏘았다. 나머지 남자들은 깊은 광산 갱구 가장자리에서 총살되었고, 시신은 그 갱도 속으로 던져졌다.

5개월 뒤 독일군은 겐비체와 주호비에츠를 다시 진정 작전의 대상으로 삼았다. 1943년 11월 11일, 폴란드 독립기념일에 맞춰 점령군은 이전 학살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번에는 남자들이 미리 숲으로 피해 있었다. 마을에는 노인들과 여성,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그날 27명이 살해되었는데, 그중에는 10명의 여성과 생후 2개월에서 14세 사이의 어린이 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 차례의 진정 작전에서 모두 136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밀정으로 밝혀진 장수 기에라다는 폴란드 지하 저항 조직에 의해 처단되었다.
기억해야 할 대가
파괴된 마을과 도시, 수백만의 학살자, 상상을 초월하는 약탈. 독일 점령의 공포를 다룬 다리우시 칼린스키(Dariusz Kaliński)의 신간 『피해의 결산』에서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 문헌
이 글은 다리우시 칼린스키의 저서 『피해의 결산: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실제로 어떠했는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