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얼굴 뒤에 숨은 충격적인 스캔들
아이들과 빵 굽는 이들, 처녀와 가난한 사람들의 수호성인. 우리는 그를 존엄한 주교의 모습으로, 혹은 붉은 옷을 입고 웃음기 가득한 노인의 모습으로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친근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성인이 한때 거대한 범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독약의 나라,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오래전부터 독사(毒師)들의 본거지로 여겨져 왔습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보나 스포르차 등 실화와 허구가 뒤섞인 일화들은 이탈리아에서의 다툼이 결투가 아니라 깨어날 수 없는 영면으로 끝난다는 믿음을 더욱 굳혀 주었습니다.
실제로 치명적인 물질을 정확하게 조제할 줄 아는 이들의 재능은 아펜니노 반도에서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주목, 투구꽃, 비소의 효능에 대한 지식은 많은 이들이 죽음의 장사로 큰 부를 축적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은 사랑의 물약을 따를 수도, 치명적인 독을 따를 수도 있었겠지요.
줄리아 토파나, 사업 수완이 좋은 독살자
17세기 팔레르모 근교에서 태어난 농부의 딸 줄리아 토파나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독살 혐의로 처형된 어머니에게 지식과 특별한 재능을 물려받았습니다. 독소 제조의 천재성에 더해 반사회적 인격과 뛰어난 사업 감각까지 갖춘 그녀는 자신의 '사업'을 실로 방대한 규모로 키워 나갔습니다.
장사 수완이 뛰어났던 그녀는 어느 날 산타클로스(그렇습니다, 바로 그 산타클로스!)가 자신에게 나타나 신비한 물질의 레시피를 전해 주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물질은 기적적인 치유력을 지닌, 성묘에서 흘러나오는 기름과도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성자의 선물
그러나 실제 그 혼합물에는 신성함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돼지고기에 비소를 문질러 넣었을 때 흘러나오는 액체였을 것입니다. 이 살인 물질 단 4방울만으로도 성인 남성 하나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완벽한 독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의 법의학 기술로는 시신에서 비소의 흔적을 검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줄리아의 독이 만드는 증상은 콜레라와 흡사했습니다. 두통과 어지럼증, 구토와 설사가 경련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의 산타클로스의 만나', 훗날 '아쿠아 토파나(Aqua Tofana)'로 불린 이 독은 순식간에 애호가들을 찾았습니다. 특히 로마와 나폴리에서는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응징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대형 범죄 스캔들에 이름이 얽히게 되었을 때, 성 니콜라스는 조용히 바리의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토파나의 희생자 수는 무려 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흥미롭게도 불륜 남편들의 대량 독살에 대한 책임은 토파나 본인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비난의 화살은 무려 몇백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성 니콜라스에게 향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이 사건들로 인해 아이들의 수호성인에 대한 호감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한편 나폴리 왕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합스부르크 군대의 손에 잡힌 토파나는 의외로 이탈리아 땅을 집어삼키는 침략자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격상되기도 했습니다.
독살자인가, 애국자인가?
결국 오스트리아군이 가한 고문 끝에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토파나는 정교한 계약 살인을 수행하는 여성 네트워크를 조직했다는 죄를 시인했습니다.

수백 명의 살인 혐의를 뒤집어쓴 미라의 성 주교라면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까요?
독에 중독된 남편들은 빠른 죽음조차 누릴 수 없었습니다. 토파나는 동료들이 독의 양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고 자백했습니다. 희생자들은 주마다 쇠약해졌고, 피가 섞인 소변을 보았으며, 머리카락을 잃어갔습니다. 어떤 불행한 이들은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죽음을 기다리기까지 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나폴리의 모든 우물에 독을 타려 한 혐의가 덧씌워졌고, 이것이 결국 독살자의 운명을 확정지었습니다. 토파나는 아마도 1723년 교수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산타의 만나'의 레시피를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 독은 어마어마한 규모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14세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포함한 수수께끼의 죽음들이 성 니콜라스의 '선물' 때문이라고 설명되곤 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바리 성당 지하 납골당에서 니콜라스가 평온히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성인의 인기는 더욱 추락했고,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프레드 미첸과 미하일 불가코프가 각자의 방식으로 기여했습니다.
전자는 니콜라스를 붉은 옷을 입고 회색 수염을 기른 선량한 노인,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존재로 그려냈습니다. 후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토파나를 교활하고 악독한 여인으로 다시 세상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수백 명의 남성의 죽음 뒤에는 무자비한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 성인이 아니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