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음굴이 있었다 —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할까?

1943년 나치는 아우슈비츠에 매음굴을 열었습니다. 죄수들에게 '추가적인 동기'를 제공해 노동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수용소 현실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매음굴 역시 평범한 일상인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었습니다.


'푸프(Puff)'라고 불린 강제수용소 내 매음굴은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주제였습니다. 가끔씩 언급될 뿐이었죠. 이 어려운 주제를 솔직하게 다룰 수 있었던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1943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시인이자 작가 타데우시 보로프스키(Tadeusz Borowski)입니다. 그는 단편 「우리, 아우슈비츠에서(U nas, w Auschwitzu)」에서 매음굴의 운영 실태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매음굴 주변에는 수용소의 유력 인물들이 운집합니다. 줄리엣(여성)이 열 명이라면, 로메오(남성)는 천 명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줄리엣 앞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로메오들은 맞은편 블록 창가에 서서 외치고, 손짓하며, 여자들을 꾀어냅니다. […]

많은 줄리엣에게는 단골 구경꾼이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과 수용소 밖 행복한 삶에 대한 맹세와 함께, 비누, 향수, 비단 속옷, 담배 같은 좀 더 구체적인 조건들이 오갑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음굴이 있었다 —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할까?

전후 아우슈비츠의 매음굴을 기록한 작가·시인 타데우시 보로프스키(왼쪽)

결코 읽기 편한 글이 아닙니다. 학대당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비인간적인 잔혹함을 겪은 수용소 포로들은 육체적 쾌락을 계속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이고 짐승과도 같은 욕구였지만, 동시에 비정상적인 현실 속에서도 '일상의 대체물'이라도 갈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로프스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는 여성에 대한 갈증이 치솟습니다. 그래서 매음굴 여성들은 사랑과 가정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평범한 여성처럼 대접받습니다. 이런 여성은 열 명뿐이지만, 수용소에는 수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죄수들을 위한 '보상'이라는 이름의 착취

강제수용소는 흔히 일상생활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포로들이 겪은 폭력과 잔혹행위가 묘사되고, 그들의 욕구는 배고픔과 목마름 해소 정도로만 한정되곤 합니다.

포로를 거의 짐승에 가까운 존재로만 보는 이런 시각은 오랫동안 문학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이미지였습니다. 지금도 지배적이지만, 지난 10여 년 사이 수용소 생활의 다른, 때로는 놀라운 주제들을 다룬 기록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강제수용소 체계 안에서 운영된 매음굴입니다. 푸프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라벤스브뤼크, 부헨발트 등 10개 수용소에 존재했습니다. 나치가 이를 허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정 민족과 인종 전체의 절멸이 목표였지만, 동시에 포로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고자 했습니다. 매음굴의 존재는 더 많은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발기인은 SS 경제관리본부장이자 나치 수용소 네트워크의 최고 관리자였던 오스발트 폴(Oswald Pohl)이었습니다. 그는 1942년 3월 23일 힘러에게 서신을 보내 이것이 제3제국에 이로운 방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설득은 먹혀들었고, 1943년 5월 새로운 포수 포상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금방 '프라우엔, 프레센, 프라이하이트(Frauen, Fressen, Freiheit)', 즉 "여자, 먹거리,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음굴이 있었다 —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할까?

수용소 매음굴 설립의 발기인 오스발트 폴.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모습

무엇보다 우선된 '인종의 순수성'

폴의 계획이 승인되자마자 수용소 매음굴들은 눈 깜짝할 새에 세워졌습니다. 그럼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을까요?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주로 생존자 증언, 회고록, 소설입니다. 독일인들은 문서를 남겼지만, 전쟁이 끝나갈 무렵 상당 부분을 불태웠습니다. 아우슈비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푸프의 운영 규칙이 전형적으로 '국가사회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인종 간' 접촉은 금지되었고, 유대인은 아예 출입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출신 생존자 브와디스와프 페이키엘(Władysław Fejkiel)이 증언한 쾌락의 집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서조차 독일인들은 인종법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자국민들에게는 독일계 금발의 통통한 여자들을 붙였고, 검은 머리에 몸매 좋은 여자들은 '하등 인종' 국민들에게만 맡겨두었습니다.

수용소라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조차 매음굴의 운영은 국가사회주의 원칙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매음굴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습니다. 오시비엠침 근처 수용소에서는 푸프가 있던 24번 블록 입장이 특별 교환권을 제시해야만 가능했습니다. 누가 교환권을 받을지는 당연히 수용소 감독관들이 결정했는데, 초기에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수용번호 6964번 파베우 스톨레츠키(Paweł Stolecki)의 회고가 이를 보여줍니다.

(아우슈비츠 III-모노비츠) 매음굴 개장은 상당히 비극적이면서도 코믹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초의 '선택받은 10인'은 라거퓌러 셰틀이 직접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들을 잊어버렸는지, 그들은 한 시간 넘게 추위 속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푸프는 매일 저녁 두세 시간씩 문을 열었습니다. 이 시간은 보통 포로들이 블록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질서와 위생에 관한 엄격한 규칙이 있었고, 이용자들은 예외 없이 따라야 했습니다. 물론 이런 제약을 회피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감독관들은 또한 여성과 이용객 사이에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도록 순환제를 운영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음굴이 있었다 —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할까?

매음굴은 포로들이 막사로 돌아가는 저녁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종업원' 각자에게 고정 번호는 있었지만, 일하는 장소는 끊임없이 바뀌었습니다. 생존자 조피아 바토르-스템피엔(Zofia Bator-Stępień)의 증언입니다.

방은 매일 바뀌었습니다. SS는 푸프에 오는 죄수들이 서로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자신이 만난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졌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 매음굴에는 약 20명의 여성이 '근무'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스스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동기는 다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생활 조건을 기대했고, 어떤 이들은 수감 전부터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자유를 약속받았다고 말했습니다. KL 아우슈비츠 I의 매음굴을 담당했던 SS 하급분대지도자 오스발트 카두크(Oswald Kaduk)의 증언입니다.

그들은 강요당하지 않았고, 자원했다고 합니다 (...). 스스로 몸을 던졌죠. (…) 그들에게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대신 석방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에게 강제로 매춘을 하게 된 여성들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주제에 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후에는 푸프에 관해 거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크리스타 파울과 라인힐트 카싱이 기록한 증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폴란드에서는 아그니에슈카 베셀리와 요안나 오스트로프스카가 수년간 수용소 매음굴을 연구해왔습니다.

자유는커녕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24번 블록에서의 '일'은 나름의 특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더 나은 식량 배급, 담배, 드레스와 깨끗한 속옷 같은 일반 의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블록 밖에서 일할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 다른 포로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책을 읽을 수도 있었습니다.

매음굴 종업원들은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전용 욕실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치는 이들에게 일정한 '노동 기준'까지 정해놓았습니다. 매춘부 각자는 밤마다 4회에서 8회의 성교를 해야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음굴이 있었다 —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할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 여성들은 종종 비극적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여성들은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푸프에 있다는 혜택은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피임도 허용되지 않는 수용소 환경에서 위생을 챙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종업원 중 한 명이 임신하면, 그녀는 그저 '평범한' 블록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아이는 그녀에게서 빼앗겼습니다.

수용소 매음굴에서의 일은 또한 막대한 심리적 비용을 동반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해방 후 그곳에서 일했던 여성들은 수치라는 낙인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른 모든 포로들이 그랬듯이 — 그저 살아남으려 했을 뿐입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세계출판사(Świat Książki)에서 출간한 도미니크 W. 레팅거(Dominik W. Rettinger)의 소설 『코만도 푸프(Kommando Puff)』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