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을 알린 골리민·푸우투스크 전투

"폴란드는 거대한 늪지다" — 대육군의 한 장교는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마조프셰 땅에서 벌어진 두 전투, 골리민과 푸우투스크에서의 교전이야말로 나폴레옹 몰락의 서막을 연 순간이었다.

"폴란드는 궁핍한 마을들과 몇 채 남은 낡은 농장들이 흩어져 있는 거대한 늪이다. 그 농장들을 지역 귀족들은 자신들의 저택이라 부른다." 1806년 겨울, 러시아군을 향해 진군하던 대육군(Grande Armée) 장교는 이처럼 암담한 그림을 남겼다.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병사들의 사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1806년 10월 14일, 프랑스군이 예나(Jena)와 아우어슈테트(Auerstedt)에서 거둔 압도적인 승리 이후,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 대부분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모든 반프랑스 동맹의 구심점인 영국과, 아직 힘을 잃지 않은 러시아가 남아 있었다. 황제는 영국을 상대로 자신이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믿었던 대륙봉쇄령을 겨누었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이후 상처를 핥고 있던 러시아는 여전히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전쟁은 계속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프로이센 붕괴라는 경악할 만한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병사들은 오랫동안 도망치는 것만이 급선무였다. 프로이센 부대와 요새들은 저항조차 없이 항복했고, 때로는 진격하는 프랑스 기병대를 목격하기만 해도 항복했다.

흥미롭게도 명백한 패배에 직면했음에도 프로이센 국왕은 공식적인 항복이나 나폴레옹과의 협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잔존 병력을 기꺼이 러시아군의 지휘 아래 맡겼다. 이 결정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기쁜 놀람을 안겨주었다. 그는 동맹 의무를 다하기로 하고 군대를 파견해 프로이센 국왕을 지원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결정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고 강조한다. 특히 일부 참모들은 차르에게 나폴레옹과 강화를 맺거나 최소한 무력 충돌을 피하라고 조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스터리츠 패배의 악몽은 아직 생생했다.

결국 전쟁의 종결을 기대하던 나폴레옹은, 무찌른 줄 알았던 프로이센이 여전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으며 게다가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게 무슨 기후고, 무슨 끔찍한 나란 말인가!

요아킴 무라 원수는 10만 대육군이 폴란드 땅을 행진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프로이센군 추격전의 고단함은 "진창과 가난 속으로 녹아내리는 야만적이고 광활한 나라", 즉 "황야와 무한함"에서 나폴레옹의 누이동생들이 견뎌야 했던 시련에 비하면 즐거운 소풍에 불과했다. 여동생들은 훗날 그렇게 회상했다.

그들에게 그곳은 진정한 세상의 끝이었다. 11월 초부터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상황의 참혹함을 더했다. 절망적인 도로 사정과 폭우로 인해 질퍽해진 길은 전진뿐 아니라 식량과 마초 확보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베를린까지, 더 나아가 프랑스까지 이어진 보급선 때문에 빠른 식량 보급은 불가능했다. 한 부대에 단 하루 치 빵이라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승리의 황홀경에 취해 있던 대육군은 러시아군이 방금 철수한 바르샤바에 11월 말 도착했다. 그리고 12월 19일, 흠뻑 젖은 채 분노한 황제가 그곳에 입성했다. 그의 우울한 기분은 지휘관들의 느릿느릿한 작전 수행 탓만이 아니었다. 황실 마차가 폴란드의 진흙을 이기지 못해 농부의 수레를 타고 일부 구간을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황제의 감시 아래

나폴레옹의 도착은 대육군의 움직임을 크게 가속화했다. 황제의 예리한 감시 아래 러시아군에게 털린 군수 창고들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차르의 초토화 전술을 고스란히 겪어온 나폴레옹 군대는 드디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작전 수행 문제를 고려해 나폴레옹은 동면에 들어갔다가, 봄이 되면 러시아군을 향해 결정적으로 움직여 드디어 정면 대결을 강요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바로 이 차르 군대의 소극적인 태도가 나폴레옹에게는 못내 유혹이 되었다. 게다가 날씨까지 황제 편에 서 있는 듯했다. 추위가 찾아왔고, 얼어붙은 진창길이 드디어 비교적 수월한 행군이 가능하게 되었다. 황제는 원수들에게 적을 활발히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혼란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대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지휘 체계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차르가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69세의 원수 미하일 카멘스키는 나이와 나쁜 시력 때문에 완전히 무능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어 알렉산드르에게 여러 차례 사임을 청했다. 그러나 차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아우스터리츠 패배의 책임을 미하일 쿠투조프에게 돌렸고,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르는 거의 실명에 가까운 원수에게 어부지리로 임명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총사령관 문제는 하급 지휘관들이 무난하게 움직인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빈 폰 벤니히센 장군과 프리드리히 폰 부크스호덴 장군은 서로 진심으로 미워하며, 좋은 데 쓰기 아까운 열정으로 서로의 험담과 음모를 꾸몄다. 이 상황에서 원수의 매우 소극적인 명령 탓에 두 장군의 작전은 전혀 조율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오히려 이득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군 진영의 혼란은 뒤쫓아오던 프랑스군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니까.

병력 분산

12월 21일 큰 기세로 시작된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 추격전은 성공 가능성이 커 보였다. 3일 동안 프랑스군은 브크라강을 건넜고, 일련의 소규모 교전 끝에 차르 군대의 일부를 두 개 집단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벤니히센이 지휘하는 더 큰 부대는 푸우투스크(Pułtusk)로 향했고, 드미트리 골리친이 이끄는 소규모 집단은 골리민(Gołymin)을 향해 후퇴했다.

이 확실한 성공에는 단 하나의 "하지만"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 사실을 사실상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무지에 한몫한 것은 또다시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날씨였다. 이전의 혹한은 급격한 온난화로 바뀌었고, 설상가상 곧 폭우가 쏟아졌다. 나폴레옹 군대의 한 병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들판과 도로, 평원 그 자체가 진짜 늪이 되었다. 대포와 마차는 이 끔찍한 땅 속으로 사라졌고, 걸음걸이마다 진흙에 엉덩이까지 묻힌 말들이 목을 하늘 높이 치켜들어야 숨을 쉴 수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의 효율적인 활동도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황제는 적의 정확한 위치나 병력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투 전에 자신의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는 근본 원칙을 깨고, 란 원수 군단(2만5천~2만7천 명)을 푸우투스크 방향으로, 무라·오주로·다부 원수 군단(3만8천 명)을 골리민 방향으로 선제 배치하기로 했다. 황제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더 북쪽인 체하누프(Ciechanów)로 향했다. 그곳에서 러시아 주력을 만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진창의 골리민

12월 26일,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첫 번째 냉정한 현실 직면은 골리민 근방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골리친의 부대가 그곳에 도착했다. 러시아군 지휘관은 도흐투로프 장군의 부대와 합류한 뒤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후 더 동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프랑스 원수들의 약 1만 병력이 러시아 진영에 대해 기병 돌격을 감행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골리친은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근위기병의 엄호 아래 전투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14시경 프랑스 보병 부대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우박 같은 소총 사격과 조준이 잘 된 포격으로 맞이받았다. 반면 프랑스 원수들에게는 포가 없었다. 작전 초기 보유한 포는 진흙 속에 빠지거나 기동에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수들이 공격에 내던진 보병의 연속적인 파도는 소용없었다. 숲과 늪에 둘러싸인 골리친은 1만8천 명의 병사와 30문의 포만으로 두 배에 달하는 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러시아 진영을 우회하려는 시도 역시 진창인 지형 탓에 대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전의 진짜 상징인 진흙은 프랑스군의 기동을 달팽이 속도로 늦춰버렸고, 그 덕분에 러시아군은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다.

지옥여단

나폴레옹 기병의 반복된 돌격 역시 물컹한 지반 위에서 위력과 효과를 잃어갔다. 게다가 그중 하나의 돌격에서, 지금까지 두려움 없이 러시아 포대를 공격해오던 라살 장군의 소위 '지옥여단' 경기병이 갑자기 멈춰 섰다. 이유는? 한 장교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혼란스럽고 놀란 최전선 병사들은 똑같이 놀란 차르군 포병의 진지 바로 앞에서 말을 세워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후위 중대들이 멈춰 선 기병들과 충돌하는 순간, 러시아 대포는 사람과 말이 뒤엉킨 그 무리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학살당한 대열이 흩어지자, 이 광경에 경악한 라살 장군 앞에서 병사들이 도주했다. 어느 순간 그는 홀로 차르군 포병과 마주하게 되었다. 죽음을 기적적으로 피한 그는 살아남은 피투성이 중대들을 신속히 재편성하여 다시 러시아 포병 진지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병들은 포대에 닿지 못했다. 라살이 적 포 사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대열 전체를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돌격 중단에 대한 처벌이었다. 총탄이 쏟아지고 대열에 핏자국이 생기는 가운데, 기병들은 황혼까지 이 부동 자세를 겸손하게 견뎌냈다. 보병과 다른 기병 부대가 골리민에 입성하면서 여단이야말로 전진했지만, 정지 명령을 위해가 아니었다. 적 앞에서 도주한 불명예스러운 자들에게는 하나의 벌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승자들에게 평화로운 휴식을 제공하는 야영 경비 임무였다.

5만 대군? 무라의 과장

일시적인 성공과 용감한 프랑스군 공격 방어에도 불구하고, 골리친은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수들의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멈춰 선 라살의 기병대를 태연히 사격할 수 있었던 그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더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편 공작의 부대에서는 병력 1천 명과 포 10문이 줄어들었고, 증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골리친은 어스름해지는 어둠을 이용하고 보유 병력을 능숙하게 활용해 적에게서 이탈했다.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나아갔다. 러시아군이 떠나자마자 원수들이 도시에 나타났지만, 밤에 적을 추격하기로는 결정하지 않았다. 골리친이 어떤 병력을 더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저항 규모가 너무 커서 무라는 황제에게 차르의 5만(!) 대군과의 전투를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푸우투스크의 진창

무라의 환상은 같은 날 골리민에서 남동쪽으로 19km 떨어진 푸우투스크에서 장 란 원수가 마주한 병력과 정확히 일치했다. 드디어 은퇴하는 카멘스키 원수의 총사령관 임명에서 자신이 빠진 것에 분노한 벤니히센 장군은 추가 후퇴 명령에 반해 저항을 결심했다. 병력 1만3천 명과 포 120문을 이끈 그는 진창의 바다를 뚫고 오는 프랑스군만을 기다렸다. 자신이 얼마나 큰 병력과 맞서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덕 위의 방어 진지라는 지리적 이점이 승리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도시 서쪽을 감싸는 숲 가장자리에 프랑스 보병 연대 10개가 처음 나타났다. 란 원수 역시 적의 병력 규모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을 명령했다. 그의 병사들은 코사크 기병을 몰아내고, 짧은 교전 끝에 차르군 보병과도 충돌했다. 러시아군은 물러났다가 곧 반격에 나섰다.

물론 반복되는 기병 돌격과 보병 공격은 진흙에 발목을 잡혔지만, 치열한 전투의 강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적과 늪지대가 병사들의 유일한 문제라고 여겨질 때쯤, 전장에 눈보라가 몰아치며 양측 모두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병사들은 감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종종 자기 부대와 우연히 총검을 맞대기도 했다. 몇 미터로 제한된 가시거리 때문에 눈 덮인 진격 부대는 적에게 최후의 순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양측 포병들도 누구를 향해 쏘는지 전혀 알 수 없어 때때로 사격을 중단해야 했다.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

사나운 자연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전투 자체를 강제로 멈추게 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조금 잦아들고 양측이 숨을 고르자, 공포는 다시 타올랐다.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과 끊임없이 공격하는 프랑스군이 팽팽하게 맞섰다. 후자는 도시 앞 진창으로 변한 전장에서 기동하며 용맹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일부 진지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지만, 어느 쪽도 전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울이지 못했다.

결국 20시경 전투가 끝나고 양측은 아침에 점령했던... 아니, 아침에 점거했던 진지 위에 쓰러지듯 멈춰 섰다. 동시에 벤니히센과 란 모두 자신이 전장의 주인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적절히 과장하며 최고 상관에게 그렇게 보고했다. 원수가 러시아군의 손실(사상자 5천 명 이상)은 부풀리고 자군의 손실(600~700명)은 터무니없이 축소한 것에 그쳤다면, 벤니히센은 당시 체하누프 근방 어딘가에서 적을 찾고 있던 나폴레옹 본인이 이끄는 6만 대군을 격파했다고 차르에게 보고했다.

프랑스 황제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골리민과 푸우투스크에서의 결판 나지 않은 전투는 그의 별이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음을 부인할 수 없이 보여주었다. "부분적인 성공과 불완전한 승리의 시대가 도래했다." 대육군의 한 병사는 그렇게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