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교황이 동성애 관계를 합법화했다?! 17세기 최대 바티칸 위조문서 스캔들

프란체스코 마스캄브루니는 성좌(교황청)라는 거대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에 불과했지만, 지극히 영리한 부품이었습니다. 초라한 성직자 봉급으로는 부족한 돈을 벌기 위해 그가 시작한 일은 바로… 교황 칙서 위조였습니다. 대규모로, 그것도 진짜 교황 서명까지 담아서요.

마스캄브루니는 1609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로마로 올라와 친척인 조반니 카밀라 마스캄브루니 추기경 회의 변호사 밑에서 필사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641년 법학 공부를 마친 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 추기경의 집무실에 취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상사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로 선출되면서, 무명 필사사의 커리어도 급상승했습니다. 교황의 처제인 올림피아 마이달키니 팜필리의 보호 덕분에 그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사제단원(canone)에 임명되었고, 팜필리가 즉위한 지 3년 뒤에는 교황령 재산 관리와 교황 문서 발급을 담당하는 기관인 사도적 세궁(Apostolic Camera)의 차관(subdataio)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교황이 동성애 관계를 합법화했다?! 17세기 최대 바티칸 위조문서 스캔들

인노첸시오 10세는 자신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들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놀랐습니다. 알레산드로 알가르디의 조각상 (사진: Ricardo André Frantz, CC BY-SA 3.0)

기묘한 면벽(赦免) 한 장

그러나 이 사제단원의 몰락은 청천벽력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1652년 초, 국무원 청사에서 교황의 오른팔인 키지 몬시뇰 앞에 분노한 예수회 신부 루이지 브란다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포르투갈 왕국이 성좌에 파견한 특사로서, 격분한 어조로 항의했습니다. 교황이 포르투갈 귀족 빌라프랑카 백작에게 부유한 여인과의 결혼을 허락하는 충격적인 면벽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일에는 더 기괴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알고 보니… 젊고 미모의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성사를 집전한 사제와 백작, 그리고 '신부'는 모두 성소재판소(Inquisition)에 체포되었습니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백작이 무려 4만 금화를 교황 특전비로 지불해 사건의 심리권을 소돔주의자와 연이 있는 현지 교구장에게 넘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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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희년 축제 카니발로 들떠 있는 동안, 교황은 적지 않은 스캔들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키지 추기경과 인노첸시오 10세는 곧바로 로마 교황청 내부 조사를 명령했습니다. 감사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교구 편성과 성직록 배분을 담당하던 다타리아(Dataria) 사무실에서 가짜 교황 칙서가 발견된 것입니다. 작성자는 주세페 브리냐르델리라는 인물이었지만, 의뢰인은 다름 아닌 프란체스코 마스캄브루니로 밝혀졌습니다.

세기를 풍미한 스캔들

교황이 동성애 관계를 합법화했다?! 17세기 최대 바티칸 위조문서 스캔들

인노첸시오 10세의 칙서. 이것은 (아마도?) 진짜입니다. 진짜는 많지 않았지만요.

필사사 브리냐르델리의 아내는 며칠 전 그 사제단원이 도피 자금을 마련해 주는 대가로 1만 3천 스투디를 가져갔다고 진술했습니다. 차관 저택을 수색한 조사관들은 그 성직자가 헤아릴 수 없는 사치품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방에는 금화로 가득 찬 돈주머니뿐 아니라 화려한 은식기 세트, 실내 장식품과 각종 선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조사관들은 또한 발송을 기다리던 가짜 칙서 70통도 발견했습니다.

마스캄브루니의 수법은 이랬습니다. 양피지 두루마리 머리 부분에 문서 요약을 적어 교황의 서명을 받아낸 뒤, 그 서명이 찍힌 머리 부분만 잘라내고 전혀 다른 내용의 정본을 새로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동성애 관계를 허용하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붉은 리본에 납인(鉛印)을 달아 교황청 문서국을 통해 자신의 심복들이 근무하던 해당 지역 대사관(nunciatura)으로 칙서를 발송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유럽 전역을 뒤덮고 있었고, 문서의 진본 여부를 입증하는 열쇠는 사실상 교황의 진짜 서명이었던 셈입니다.

교회 사기꾼들의 말로는?

조사 시작 한 달 후, 마스캄브루니는 악명 높은 토레 디 노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피고는 모든 것이 교황과 키지의 국무원장이었던 카밀로 아스탈리-팜필리 추기경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고 자백했습니다. 교황 다음가는 교황령 최고 직책이 자신에게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인노첸시오 10세는 이 사제단원의 행위를 반역죄로 간주했습니다. 1만 1천 명이 참고인으로 조사된 두 달간의 재판 끝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로사노 공녀 올림피아 알도브란디니의 탄원도, 변호사들의 궤변도 소용없었습니다. 팜필리 추기경의 노력 덕분에야 교황은 프란체스코가 고문 없이 단두형으로 처형될 수 있게 허락했을 뿐입니다.

교황이 동성애 관계를 합법화했다?! 17세기 최대 바티칸 위조문서 스캔들

산탄젤로 성. 불운한 위조범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652년 4월 14일, 프란체스코 마스캄브루니는 사제직을 박탈당한 뒤 입을 막힌 채 처형 장소인 산탄젤로 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자선단회(Society of Mercy) 회원들에게 고해성사를 보며 그는 자신을 정점까지 올려준 올림피아 팜필리의 돈을 횡령한 죄와 페르모 대성당을 위한 특권 문서 위조죄 등을 시인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그는 참수되었고, 잘린 머리는 시신에 꿰매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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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들에 충격을 받고 마비된 교황은 주변 사람들에게 점점 오만해졌습니다. 그는 집사장과 시종장을 뜻밖에 가차 없이 굴욕을 주었고, 아스탈리-팜필리 추기경과 성좌 총독 버질리오 스파다를 질책했습니다.

의심에 사로잡힌 그는 가족, 하인, 성직자들에게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통풍과 신장결석에 시달리던 그는 이 사건으로부터 2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때 교회의 보물과 귀중품을 챙겨간 처제 덕분에, 그는 외롭고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렇게 근대 교회 역사상 최초는 아니더라도 가장 요란했던 '바티리크스(VatiLeaks)' 스캔들은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