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지 폴란드에서 나치의 억압 체계는 밀고자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습니다. 밀고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전혀 아닙니다. 총독부 '수도' 크라쿠프에서만 독일 당국은 수백 명의 밀고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점령군은 1939년 초가을부터 크라쿠프에서 밀고자 네트워크 구축에 착수했습니다. 스파이가 되기를 택한 사람들의 동기는 다양했습니다. 물질적 이익을 노린 사람도 있었고,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치는 전쟁 내내 약 800~1,000명의 요원과 협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제이 흐발바(Andrzej Chwalba) 교수는 저서 『1939–1945 점령기 크라쿠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크라쿠프 반첩보부[국내군(Armia Krajowa) – 역자 주]가 1944년 9월에 작성한 명단에는 686명의 요원이 올라 있었습니다. 이후 신원이 확인된 인물이 더 늘어나 총 803명에 달했습니다. 명단의 첫 줄은 중앙역 뷔페 종업원으로 시작됩니다. 즉 주민 300명당 밀고자 1명꼴이었던 셈입니다.
작지만 강력한 고발자들
요원과 협력자는 도시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사회 계층과 민족 집단에서 모집되었습니다. 폴란드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이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단코 레들리히(Danko Redlich)처럼 진짜 프로도 있었습니다. 그는 전간기 공산주의 요원 출신으로, 게슈타포와의 '인연' 이후에는 보안국에서 일했습니다.

스카우트 출신 밀고자 스와보미르 비사와 '피라트'(가운데). 1943년경 '알리차' 소대 스카우트 두 명과 카드 놀이를 하는 모습. 안제이 예조프스키의 안내서 『포모르스카 거리』(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2011) 수록 사진
독일인들은 일부 협력자를 기존 국가경찰로부터 '물려받기'도 했습니다. 지하 조직에서 무너진 멤버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열여섯 살 스카우트 스와보미르 비사와 '피라트'였습니다. 그는 고문과, 아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만류 끝에 게슈타포와 협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동료 대부분이 체포되었습니다. 배신죄로 지하 군사특별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형은 1944년 3월 31일 집행되었습니다. '피라트'의 어머니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그녀 또한 밀고자였습니다.
반면 헨리크 보이체흐 코펠(Henryk Wojciech Koppel)은 지하국가의 응징 손길을 피해 갔습니다. 무공십자훈장을 두 차례 받은 전직 폴란드군 대위였던 그는 1941년 3월 체포된 뒤 잔혹한 조사에 못 이겨 요원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제고시 예조프스키(Grzegorz Jeżowski)는 안내서 『포모르스카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그는 쿠르트 하이네마이어(Kurt Heinemayer)와 루돌프 쾨르너(Rudolf Körner) 등 간부들에게 정기적으로 정보를 흘렸습니다. 코펠의 밀고 활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중 돌아온 이는 없었습니다. 코펠은 엔지니어 얀 골롬베크(Jan Gołąbek)를 두 번이나 고발했습니다. 처음에는 게슈타포에, 그리고 전후에는 보안국에 말입니다.
독일을 위해 일한 또 다른 군인은 9월 전역 참전 용사 로만 슬로냐(Roman Słonia)였습니다. 그의 조직은 점령당국을 위한 활동 외에 범죄 행위에도 손을 뻗쳤습니다. 게슈타포가 무장을 든든히 해 준 이 일당은 처벌받지 않으리라 믿었고, '해골 문장' 경찰들은 슬로냐 일당의 범죄를 눈감아 주며 때때로 그들을 감옥에서 직접 꺼내 주기까지 했습니다.

전직 폴란드군 대위 헨리크 코펠이 독일 당국에 넘긴 정보는 수많은 크라쿠프 주민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전후 그는 보안국에서 일했습니다. 안제이 예조프스키의 안내서 『포모르스카 거리』(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2011) 수록 사진
그러나 결국 판세가 뒤집혔고, 국내군은 기지를 발휘해 개입하기로 했습니다. 『크라쿠프 – 나치 점령 1939–1945』의 한 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1944년 봄, 크리포(Kripo)[독일 형사경찰 – 역자 주] 요원들은 길거리 다툼을 빙자해 슬로냐 조직 소속 한 명을 체포했습니다. 크라쿠프 크리포에는 국내군 병사들이 잠입 근무 중이었고, 그들은 신속히 사건을 장악했습니다. 국내군 소속 크리포 장교 스타니스와프 슈체파네크(Stanisław Szczepanek) '야누시' 중위는 독일인 상관에게 […] 조사 과정에서 비밀 거점을 폭로한 깡패를 검거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루돌프 쾨르너, 헨리크 코펠과 모리스 디아만트를 포함한 수많은 밀고자가 그의 휘하에 있던 게슈타포 장교다. 안제이 예조프스키의 안내서 『포모르스카 거리』(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2011) 수록 사진
이후 일은 눈 깜짝할 새에 진행되었습니다. 실적을 세우고 싶었던 그 장교는 게슈타포와 상의도 없이 부하들을 지목된 주소로 파견했습니다. 일당이 웅크리고 있던 블리흐(Blich) 거리 7번지 건물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로만 슬로냐와 그의 부하 여러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인들 스스로가 지하국가의 사형 집행관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나치를 위해 일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가장 규모가 크고 위험한 조직은 모리스 디아만트(Maurycy Diamand)가 이끄는 네트워크였습니다. 이 조직은 1944년 여름에야 적발되어 해체되었는데,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국내군의 공이었습니다. 디아만트 본인은 같은 해 9월 크라쿠프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한 설에 따르면 그는 독일인에게 살해되었고, 다른 설은 그가 전쟁을 살아남아 빈으로 떠났다고 전합니다.
가장 위험한 밀고자 중 하나로 악명 높은 율리안 아펠(Julian Appel)도 같은 조직에 몸 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숨어 지내는 유대인과 폴란드·유대인 지하 조직원을 색출해 독일 당국에 넘기는 데 특화된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유대인 전투 조직과 폴란드 지하국가가 모두 아펠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처단에는 실패했고, 그는 철수하는 독일군과 함께 도시를 빠져나갔습니다.
밀고자와의 싸움

스타니스와프 코스트카 차프키에비치 '비오스나'. 국내군 산하 밀고자 정보 수집망을 총괄했다. 안제이 예조프스키의 안내서 『포모르스카 거리』(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2011) 수록 사진
물론 무장투쟁연맹(ZWZ)과 이후 국내군(AK)은 밀고 행위와의 투쟁에 나섰습니다. 크라쿠프의 국내군은 밀고자 정보를 수집하는 탄탄한 첩보·반첩보망을 운영했습니다. 이 임무는 스타니스와프 코스트카 차프키에비치 '비오스나(봄)'가 이끄는 요원들이 맡았습니다. 그의 조직원들은 우체국 등에서 근무하며 밀고 편지를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크리포에 잠입한 지하 요원들 역시 배신자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흘려 보냈습니다. 이렇게 확보된 자료는 지하 언론에 여러 차례 게재되어 독일의 밀고자들을 겁주고,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밀고자들에게 경고를 보내 활동을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먹히지 않으면 강제 수단에 의존했습니다. 전쟁 기간 크라쿠프에서는 수십 명의 밀고자가 처단되었습니다. 첫 사형은 1940년 11월 6일 전직 군헌병 얀 플라테라(Jan Platera)에 대해 집행되었으며, 얀 코스테츠키(Jan Kostecki) '지비오우(Żywioł)'와 얀 흐로미(Jan Chromy) '델핀(Delfin)'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밀고자 소탕 작전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43년이었으나, 이후 점령당국의 보복 탄압이 거세지면서 주로 경고 서한 발송, 협박, 매질 처벌 등으로 방식을 바꾸게 됩니다.
크라쿠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점이 있습니다. 독일을 위해 일한 사람의 수에 있어 크라쿠프는 결코 예외적인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추산에 따르면 게슈타포는 점령 폴란드 전역에서 약 6만 명의 요원과 협력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총독부 '수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양한 사회 계층과 민족 집단 출신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바로 나치('갈색') 정권의 수천 명 희생자의 피가 그들의 손에 묻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점령자에게 밀고자가 얼마나 '유용'했는지는 다음 수치가 잘 보여 줍니다. 체포되거나 수배된 사람의 3분의 1이 밀고자가 제공한 정보 덕분에 게슈타포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다수는 전후 '고용주'를 갈아타고 공산주의 탄압 기구와 손잡았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게슈타포에 밀고했던 바로 그 인물들을 다시 밀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