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사회적 분노, 17세기 스타일로 — 브레스트 연합에 맞선 백성들의 저항

권력이 민심을 건드릴 때 벌어지는 일

얼마 전 우리는 권력이 수백만 인터넷 사용자의 신경을 건드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17세기에는 ACTA도 인터넷도 없었지만, 놀랍도록 유사한 상황이 존재했다. 다만 항의의 방식은 훨씬 더… 강경했다.

브레스트 연합: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던 프로젝트

설득력 있는 예시를 하나 찾아보자. 소위 '브레스트 연합(우니아)'이 제격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정교회를 가톨릭교회와 통합하려던 이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그 배후에는 특권과 후한 보상을 약속받은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폴란드의 교회·국가 당국이 있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최대 추진자는 다름 아닌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ACTA와 놀랄 만큼 흡사했다. 우선 당국은 수백만 명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결정을, 이들의 참여 없이, 논의조차 없이, 가능하면 완전히 비밀리에 처리하려 했다. 처음에는 정교회 성직자와 귀족 하층부가 참여하는 특별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이 구상은 금방 무산되었다. 결정은 지그문트 국왕이 내렸다. 반대 여론이 커진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모든 논의를 중단하고 실행을 서둘러 명령한 것이다.

키예프 교회의 고위 성직자 키릴 테르레츠키와 히파치 포체이는 로마로 향했고, 1595년 12월 23일 키예프 관구가 로마 교회와의 연합에 편입되는 특별 의식에 참석했다. 그들은 돌아온 뒤에서야 이미 마무리된 안건을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통보하면서, 마치 아직 협상의 여지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사회적 분노, 17세기 스타일로 — 브레스트 연합에 맞선 백성들의 저항

히파치 포체이와 요자파트 쿤체비치. 포체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손가락을 잃었다. 쿤체비치는 살해당했지만(위 사진 참조), 적어도 순교자의 이름을 얻었다… (쿤체비치 초상화: 퍼블릭 도메인, 포체이 초상화 사진: Maciej Szczepańczyk, CC BY 3.0)

당시 상황을 『1975년까지의 우크라이나 역사』의 저자 나탈리야 야코벤코는 이렇게 요약했다. "이렇게 해서 루테니아는 불균등한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한쪽에는 지도자를 잃은 정교회 공동체 전체가, 다른 쪽에는 신자 없는 루테니아 출신 동방연합(Uniate) 고위 성직자들이 섰다."

뜻밖에도 당국은 사회적 반발의 규모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다. 익명의 필자는 이렇게 적었다. "가장 큰 놀라움은 세속 영주들과 평민들이 거룩한 열정을 불태우며 계획에 온 힘을 다해 맞섰다는 점이다."

백성은 자신의 것을 위해 싸운다

그 후 사태는 2012년 초를 생생히 기억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귀족, 성직자, 시민, 그리고 평범한 농민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강행된 교회 연합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은 ACTA '논쟁'과 무엇이 달랐을까? 바로, 17세기판 '익명(Anonymous)'의 선구자들은 서명 수집과 집회 시위에만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회적 분노, 17세기 스타일로 — 브레스트 연합에 맞선 백성들의 저항

브레스트의 성 니콜라스 교회. 형식적으로는 이곳에서 '브레스트 연합'이 체결되었지만, 좋은 결실은 거의 맺지 못했다…

가장 가벼운 행동 수단은 선전이었다. 우선 동방연합 주교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이 신자들 사이에 퍼졌다. 히파치 포체이에 대해서는 몰래 유대교로 개종해 할례까지 받았다고들 했다. 테르레츠키 주교는 1607년 사망 후 더 심한 공격을 받았다. 곧 그가 악마 본인에게 교살당해 빈 나무통 속에 숨겨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그의 하인들이 시신을 진흙 속에 던져 넣었고, 까마귀가 눈을 파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게다가 공격은 최대의 적들에만 머물지 않았다. 타협을 지지하는 모든 이가 표적이 되었다. 어느 멜레치우시 스모트리츠키는 1628년 교황파와 화해할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운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실로 격렬한 설전이었다! 그러나 연합 반대파는 말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싸웠다. 히파치 포체이는 회개하지 않는 정교 신자 세 명이 감행한 습격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운 좋게도 그는 몽둥이질을 피해 몸을 숨겼고, 미끄러진 도 칼날이 관구장의 손가락을 잘라내고 옷을 찢었을 뿐이다.

사회적 분노, 17세기 스타일로 — 브레스트 연합에 맞선 백성들의 저항

안토니 흐레코비치는 운이 덜 따랐다. 포체이는 그를 키예프로 보내 중요한 교회 하나를 인수하게 하려 했다. 코사크 헤트만 흐리호리 티스키니에비치는 먼저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 도시에 오는 날에는 개처럼 죽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흐레코비치는 이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그랬어서는 안 됐는데. 몇 년이 지난 1618년, 마침내 사망이 고집스러운 총독을 찾아왔다. 코사크 무리가 그를 드니프로강에 빠뜨려 익사시킨 것이다. 당시 도시 사람들은 흐레코비치가 물 좀 마시라고 얼음 밑으로 인도되었을 뿐이라며 쓴소리 섞인 농담을 던졌다.

비슷한 운명은 1623년 11월 동방연합 포워츠크 대주교 요자파트 쿤체비치를 찾아왔다. 그가 위험한 불씨를 쓸데없이 지핀다는 경고를 듣지 않자 살해당했고, 시신은 강에 던져졌다.

이것은 결단력 있는 행동의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전반적으로 세속 권력자든 성직자든, 당국 대표자들의 피는 시냇물처럼 흘렀다. 그렇다면 이 항의는 기대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국왕은 빠르게 태도를 완화해 연합에서 사실상 물러났지만, 폭풍이 조금 가라앉자마자 마음을 바꿨다. 정교회 측은 더 큰 규모의 무력 논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것이 통했고, 마침내 루테니아에는 정교회와 동방연합교회, 두 개의 교회 조직이 공존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 나탈리야 야코벤코, 『1795년까지의 우크라이나 역사』, PWN(폴란드 과학출판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