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도 죄수였지만, 교활함과 잔혹함으로 SS 대원들조차 위협할 정도였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처벌 없이 다른 수용자들을 학대하고 약탈하며, 심지어 살해할 수도 있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지위에 올랐고, 나치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의 대가로 무엇을 받았을까?
"아니, 가장 강한 관리자라 해도 수천 명의 죄수를 손아귀에 넣고 통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수들 사이의 상호 반목이라는 도움이 없었다면 말이다." 전후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öss)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이었다. 일부 죄수가 독일인들과 협조하여 동료 수용자들을 통제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어떤 강제수용소도 기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전쟁 이전부터 범죄자와 이른바 '반사회적' 죄수들이 강제수용소 내 다른 수용자들을 통제하는 데 동원되었다. 보통 이들은 제국의 형무소에서 이미 형기를 치른 살인범, 도둑, 포주 또는 매춘부들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이른바 기능 죄수(function prisoners)로 불린 이들은 여러 역할을 맡았다. 우선 폐쇄 구역 전체 또는 개별 방과 블록 단위로 질서와 규율을 유지했다. 또한 수용소 사무실 업무에 참여하거나 관리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의 봉사에 대한 보상은 권력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특혜였다. 더 많은 식량 배급량, 담배, 술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대개 다른 수용자들보다 나은 환경, 예컨대 건물의 별도 구역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통치하는 대상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 최대한 편안하게 정착하기 위해 이를 자주 행사했다.
카포는 자신이 감시하는 죄수들의 생사여탕권을 쥔 존재였다. 사진은 에벤제(Ebensee) 수용소 생존자들이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듯이 이 특권 계층은 동료 수용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움받은 것은 강제 노동 중 죄수들을 감시하는 감독관, 즉 카포(kapo)였다.
잔혹한 코만도 감독관들
'카포'는 이른바 라거(Lager) 언어, 즉 수용소 은어에서 온 말이다. 이 명칭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카메라덴폴리차이(Kameradenpolizei), 즉 '동료 경찰'의 약어라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이탈리아어에서 '머리'이자 '감독관, 상사'를 뜻하는 카포(capo)에서 차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 용어는 모든 곳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일부 수용소에서는 카포를 '카포맨'으로, 심지어 다하우(Dachau)에서는 '염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역할을 수행한 여성들은 '안바이처카' 또는 '카포만카' 등으로 불렸다.
카포는 노란색 완장과 매질용 몽둥이로 식별할 수 있었다. 그 밑에는 노동조, 즉 코만도(commando)가 있었고, 보통 조수들도 두었다. 조수들은 포라르바이터(vorarbeiter), 힐프스카포(hilfskapo), 운터카포(unterkapo), 코포(kopapo) 등 다양하게 불렸다. 때로는 더 큰 조직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경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상급자가 감독했다. 이들은 모두 수용소 최고 책임자인 '오버카포(oberkapo)'의 지휘 아래 있었다.
수용소 행정부와 협조한 죄수 감독관들은 코만도의 창설과 운영을 책임졌다. 노동 중 규율을 감독하고 적절한 작업 속도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탈출을 막고 감시 대상 집단의 인원수를 보고해야 했다. 그들은 다른 수용자들에 대해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하고, 식량 배급을 빼앗고, 구타하고, 어떠한 결과도 감수하지 않고 살해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잔혹함을 서로 겨루기까지 했다.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수용자들을 도발하고 고문했다.
"그는 번복 불가능한 명령을 내렸다. 매일 자신의 경계심을 과시하고 권력을 뽐내기 위해, 예컨대 눈에 띄는 죄수 하나를 골라 구타했다." KL 아우슈비츠 수용자 샤를 리블로(Charles Liblau)는 자신의 감독관 중 한 명이었던 이그나츠(Ignatz)를 이렇게 묘사했다. 다른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었다.
[SS 출신] 새 상사들에 대한 아첨. 지배와 명령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불행히도 그의 지휘 아래 놓인 죄수들에게 분출되었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카포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치는 수십만 명의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에게 노역을 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중 수용소에 갇혔던 작가 조피아 포스미슈(Zofia Posmysz)는 자신의 감독관들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단 죄수가 한 번 맞으면 결국 죽어야 했다. 곧장은 아니었다. 로라와 트루다는 이미 그 일을 맡아두었으니까. 그들은 끝내지 못한 희생자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카포의 지위가 불가침인 것은 아니었다.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직책을 잃고 일반 죄수 대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이 겪는 것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고된 노동, 굴욕, 구타, 탈진으로 인한 죽음, 아니면 선발(selection)의 결과로 오는 죽음이었다. 게다가 전직 부하들의 복수에 시달릴 위험도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미움받는 감독관들은 더욱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돕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 중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죄수 유형 간의 비율은 점차 변화했다. 정치범과 폴란드인, 유대인 등 독일인이 아닌 다른 국적의 수용자들이 기능 죄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용소 행정 업무에 종사했고, 방 담당자나 블록 감독관이 되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카포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변화는 수용소의 엄격함에도 다소 영향을 미쳤다. 정치범 출신 기능 죄수들이 자신의 지위를 사적 목적뿐 아니라 다른 수용자들을 덜어주는 데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2년 중순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조피아 포스미슈를 감시하던 카포 중에는 폴란드인 카포가 있었는데, 그는 부하 죄수들을 최대한 도우려 노력했다. 노동 중 짧은 휴식을 허용하고 SS 감독관이 다가오면 미리 알려주곤 했다.
조피아 포스미슈의 이야기는 모든 카포가 타락한 사디스트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마우트하우젠(Mauthausen)에서 긴 수감 생활 끝에 그 지위에 '올라선' 스테판 크루코프스키(Stefan Krukowski) 역시 카포였다. 그는 SS 피복 창고 직원인 수용소 '프로모토르' 자리로 '승진'했다. 그 전에 그는 수용소 생활의 모든 단계를 거쳤다. 한때 처벌 중대에 있었고, 심지어 이른바 '무슬림(Muselmann)', 즉 극도로 쇠약해져 일할 수 없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훗날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나는 카포였다』에서 그는 죄수 계급의 상위로 넘어간 것이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갑작스러운 변신은 나를 즐겁게 했다. 냉소에 가까울 만큼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조차 갑작스러운 '권력의 무한함'에서 일종의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가끔 내 연기가 연기가 아닌 실체가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크루코프스키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더 많은 배급을 확보하는 데만 쓰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이들도 도왔다.
사실 배정된 음식을 다 먹을 수 없었고, 그 슬리보비츠(자두 브랜디)를 다 마시지도 않았다. 이렇게 '조직'한 빵과 보드카는 적절한 손에 제때 들어가면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중개자였을 뿐이다. 물론 그 시절 굶주리지도 춥지도 않은 중개자였지만.
마우트하우젠에서 여러 해를 보낸 스테판 크루코프스키는 마침내 카포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크루코프스키나 조피아 포스미슈가 기억한 폴란드인 여성 같은 이들은 예외에 불과했다. 카포는 독일 강제수용소의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의 존재 덕분에 나치는 부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SS 인력을 절약하고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용소 내 폭력에 대한 책임을 죄수들과 분담할 수도 있었다.
전후 일부 카포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SS 출신 상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일부는 전직 부하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많은 잔혹한 기능 죄수들의 전후 행방은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 자료
이 글은 마치에이 셈비에다(Maciej Siembieda)의 소설 『장소와 이름(Miejsce i nazwisko)』(Wielka Litera, 2018)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