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5월 14일은 근대 프랑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긴 날이다.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라 페로네리 거리에서 칼에 찔려 비명에 졌다. 이 극적인 사건의 목격자이자, 파리 시민들의 눈에는 오히려 용의자이기도 했던 인물이 바로 폴란드 대귀족 야쿠프 소비에스키, 훗날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아버지였다.
사건 당시 야쿠프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서유럽 전역을 도는 유학 여행 중이던 그는 이미 1607년, 프랑스 궁정에서 열린 네덜란드 연합공화국과의 강화 협상 당시 프랑스 군주를 알현한 바 있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난 윌리히클레베 공작의 영지 상속을 노린 앙리 4세의 구상을 직접 접했으며, 이후 루이 갈루초 드 로피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 원정군에도 참여했다.

성숙한 남성의 시절, 온전한 위엄을 드러낸 초상화 속 야쿠프 소비에스키.
바로 이 계획이 스페인 국왕과 황제로 하여금 '앙리 왕을 어떻게 해서든 무력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밀라노 총독 푸엔테스 백작의 배후 지원 아래 사보이아의 밀정 라 핀 라 노클레가 감행한 첫 번째 암살 시도는, 밀정이 고용주를 배신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웃 나라들은 쉽게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왕 암살 음모… 배후는 폴란드인?
그렇게 다가온 것이 불운의 날, 5월 14일이었다. 앙리 4세는 마차를 타고 루브르 궁을 떠나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목적은 전쟁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 르 알 거리와 생드니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술통을 실은 짐마차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30년 뒤 회고록에서 소비에스키가 회상했듯, 이 비극의 주인공, 살인자 프랑수아 라발라크가 왕의 마차 위로 몸을 던졌다.
"라발라크는 아무도 앉지 않은 창가로 뛰어올라 즉시 왕에게 칼을 두 번 찔러 대정맥을 맞혔다. 상처에서 피가 쏟아졌고, 입과 귀에서도 피가 흘러넘쳤다. 불쌍한 왕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보소서, 저는 이미 죽었나이다, 이제 죽어가나이다!"라는 말만 남긴 채 그토록 슬픈 운명 속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샤를-귀스타브 우즈의 그림에 담긴 앙리 4세 암살 장면 (출처: 퍼블릭 도메인).
소비에스키는 이 살인을 직접 목격했고 왕의 죽음을 뼈아프게 받아들였다. 그가 기억하는 군주는 교양 있고 이성적이며 용감하고 사교적인 매력의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권력과 세계 지도자의 자리를 향한 뜨거운 갈망을 품은 사람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동행한 미코와이 크시슈토프 라지비우와 스타니스와프 알브릿 라지비우 형제와 함께 5월 14일 직후 파리 시민들의 집요한 괴롭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암살자의 손이 닿은 앙리 4세.
수도의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인들이 이 공격을 준비했다고 잘못 믿었다! 생트주느비에브 수도원장 데스큐레 신부는 소비에스키에게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소지품을 맡겨두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소란과 선술집·가옥 약탈, 마침내 거리 전투까지 벌어진 상황은 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기가 들어간 스크램블 에그
소비에스키는 비극의 다음 장면, 살인자의 재판을 어쩔 수 없는 목격자로 지켜봐야 했다. 그는 일지에 앙굴렘 출신 프랑수아 라발라크가 스페인 출신 예수회 신부이자 역사가인 후안 데 마리아나가 제창한 참주살해(暴君殺害) 교리의 추종자였다고 적었다. 그는 미친 자이자 깊은 우울에 잠기고 사탄적 충동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된다.
이 정치적 살인 행위는 파리 고등법원의 가혹한 처벌로 이어졌고, 라발라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향의 그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4대에 걸친 후손들은 자치 및 국가 요직에 임명되는 것을 금지당했다. 후안 데 마리아나의 저작 역시 공개적으로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고, 인쇄 또한 엄금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에도 살인자를 향한 자생적 '숭배'는 막을 수 없었다. 소비에스키에 따르면 처형이 끝난 뒤 라발라크의 시신 조각들은 시민들에 의해 거두어져 성유물처럼 다뤄졌다. 그는 또한 루시에츠 출신 피오트르 브라니츠키와 함께 머물던 하숙집 주인이 행한 기이한 형태의 '숭배'에 대해서도 기록으로 남겼다.

프랑수아 라발라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무거운 대가로 끔찍한 고통 속에 처형당했다.
책장이 업이던 그 하숙집 주인은 시신 조각들을 스크램블 에그에 넣어 먹었고, 하객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권했다.
"평소에는 진중해 보이고 훌륭한 수염을 기른 이 주인은 라발라크의 시신 조각 몇 개를 가져와 달걀 스크램블에 볶아 넣고는 내 눈앞에서, 그리고 브라니츠키 님의 눈앞에서 그것을 먹었다. 그는 심지어 우리 두 사람에게 자신의 연회에 동석해 식사를 함께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감히 나섰다."
폴란드 귀족들은 그만큼이나 기이한 방식으로 이 주인에게 답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