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에 고의로 감염시키고, 대규모 매독 감염 실험을 벌이고, 눈의 혈관과 뼈가 터질 정도의 시험까지. 광기 어린 자들의 실험처럼 들리지만, 이것이 바로 20세기 미군 연구 프로그램의 실제 모습이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비윤리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이어진 냉전이 몰아온 불안감 속에서, 규칙을 무시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화학 물질과 방사성 물질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시작되었고, 위험한 질병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군인, 매춘부, 정신질환자들이 실험 대상으로 동원되었다. 때로는 '대상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때로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미국판 카미카제
1940년대 전투기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미국 엔지니어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다. 심각한 건강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중력 하중은 어느 정도일까? 이 분야의 연구는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속화되는 군비 경쟁과 함께 지속되었다. 1954년에는 조종사를 죽이지 않고 기체에서 탈출시키는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인체가 견딜 수 있는 최대 과부하를 확인하기 위해 특수 썰매가 만들어졌다.
물론 겨울 스포츠의 그 썰매가 아니었다. 소닉 윈드 1호(Sonic Wind No.1)는 로켓 엔진으로 구동되는 장치였다. 첫 실험은 홀로먼 기지에서 침팬지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곧 사람의 차례가 되었다. 공군 의무 장교 존 스탭(John Stapp)이 실험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1944년부터 미 공군에서 복무한 의사로, 평생의 과제를 인체의 신체적 한계 탐구로 삼았다. 더 정확히는,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탐구였다.
수많은 실험에 몸을 던진 존 스탭.
C. 캐시디와 P. 도허티의 저서 당신은 이미 죽어 있다(You're Dead Already)에 따르면, 스탭은 지옥 같은 썰매에 앉기 전 산소 시스템을 시험하다 거의 질식할 뻔했고, 시속 약 920km로 개방형 조종실에서 비행하다 피부가 벗겨질 뻔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잘 알았지만, 또다시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로켓 썰매는 그를 묶어둔 채 마하 0.9, 즉 시속 1,100km까지 가속했다. 그리고 단 1.4초 만에 급정지했다. 스탭의 몸은 46.2G의 하중을 받았다. 비교하자면 롤러코스터는 '겨우' 5G 수준이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 대가가 컸다. 갈비뼈에 금이 갔고 손목이 부러졌으며, 눈의 혈관도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나치의 화학 유산을 자국민에게 실험? 왜 안 되겠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치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 미국은 제3제국을 위해 개발된 독가스의 제조법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이들 과학자를 활용하는 것의 윤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화학물질 공격 시 나타나는 증상과 그 치료법에 대한 심층 실험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약 7,000명의 군인과 1,000명의 민간인이 LSD, 사린, 벤조디아제핀을 포함한 250종의 화학물질에 소량씩 노출되었다.
미 육군의 실험과 기타 충격적인 죽음의 원인들은 코디 캐시디와 폴 도허티의 책 '당신은 이미 죽어 있다'(즈낙 호리존트)에서 상세히 다뤄진다.
연구는 메릴랜드주 에지우드 병기창(Edgewood Arsenal)에서 진행되었다. 1975년, 이 프로그램은 스캔들 분위기 속에 종결되었다. 참여 군인들은 연구자들의 직업 윤리 결여를 고발했고, 이는 민간 소송과 정부 보고서의 쏟아짐으로 이어졌다. 유사한 성격의 연구는 '프로젝트 12'라는 이름으로도 진행되어 생물학·화학 작용제의 에어로졸 살포 방식이 시험되었다.
실험용 쥐는 고아원과 정신병원이 공급했다
다른 학술 기관들도 미 육군의 연구에 가담했다. 시카고대학교 의과대학은 말라리아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해, 29년 동안 줄리엣 교도소 수감자들의 몸에서 질병의 진행 과정 데이터를 얻었다. 1940년대에는 일리노이 주립 정신병원 환자들에게도 말라리아가 감염되었다.
1939년에는 아이오와의 군 고아원 아동 22명이 '몬스터 스터디(Monster Study)'라 불리는 실험에 동원되었다. 아이오와 대학교 웬델 존슨(Wendell Johnson) 교수의 지도를 받던 박사과정생 메리 튜더(Mary Tudor)는 말더듬이 심리적 압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일부 아이들은 뛰어난 말솜씨를 칭찬받은 반면, 다른 아이들은 말을 못 한다고 잔인하고 노골적으로 비난받았다. 압박을 통해 그들에게 질병을 유발하려 한 것이다. 아이들은 내성적이 되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한 명은 고아원에서 도망쳤다. 다른 아이들은 자신을 굴욕시키고 자신감을 무너뜨리려 한 실험의 심리적 후유증과 수년간 씨름해야 했다.
'몬스터 스터디'는 아이오와 대학교(사진: 문리과대학)의 의뢰로 진행되었다.
비윤리적 실험의 진실은 덮였고,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희생자들이 배상을 받아낸 것은 2007년에야 이루어졌다.
'과학'을 명분으로 한 강제 이주
군의 확실한 관심사는 핵무기였다. 1945년 8월 2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이언 맥마흔(Brian McMahon) 상원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원자 폭탄의 파괴력을 시험하기 위해, 나는 바다 위에서 그 폭탄에 맞는 일본 선박들을 보고 싶다.
지식 확장에 대한 열망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준비된 표적선에 원폭을 투하하는 일련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적의 선박이 아니라 자국의 선박이었다. 함선들은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에 배치되었다. 그 전에 해당 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강제 이주당했다. 배 위에는 쥐, 생쥐, 돼지, 기니피그, 염소 같은 동물들도 함께 실렸다. 첫 실험은 1946년에 이루어졌다. 이후 10년간 이 지역에서 총 20회 이상의 핵실험이 진행되었고, 폭발물은 공중에서, 수중에서, 해저 깊숙이 터졌다.
에이블(Able) 실험의 조감도 (1946).
환초 지역은 되돌릴 수 없이 오염되었다. 그곳에서 사는 것, 작물을 재배하고 물고기를 잡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주민들은 고향을 잃었고, 더 먼 섬의 주민들 다수도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되어 암 발병 위험이 커졌다. 현장은 끝내 정화되지 않았으며, 수십 년 된 폭발의 생태학적 결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10년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자국민만으로 부족할 때는
지식에 굶주린 미국 과학자들은 자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아니 심지어 변덕에 따라서도, 타국의 '인적 자원'에 손을 뻗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가 그들의 다음 실험장이 되었다. 현지 관료들의 협조 아래 군인, 매춘부, 정신질환자들에게 매독이 감염되었다. 감염은 물론 고의적인 것이었지만, '환자'들은 실험 절차에 대해 전혀 통보받지 못했다. 이들은 이후 항생제로 치료받았다.
수석 의사는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서 흑인 농부들을 대상으로 한 유사한 실험에 참여했던 의사 존 찰스 컷러(John Charles Cutler)였다. 약 600명의 농부가 컷러 박사의 첫 번째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대부분은 연구 당시 이미 병을 앓고 있는 남성들이었다.
터스키기 주민 한 명에게 위약을 처방하는 의사.
농부들은 이 연구가 이른바 '나쁜 혈액(bad blood)'에 관한 것이라 믿었다. 이는 매독 증상은 물론 빈혈과 만성 피로까지 가리키던 지역 용어였다. 연구 참여의 대가로 그들은 무료 식사와 의료 혜택을 받았고, 실험 중 사망한 이들의 가족에게는 500달러가 지급될 예정이었다. 6개월로 계획된 연구는 결국 40년으로 늘어졌다. 1972년 내부 고발자의 기사가 발표되면서야 비인간적인 연구는 중단될 수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컷러는 한층 더 나아갔다. 1,500명이 고의로 매독에 감염되었다. 일부에게는 병원균이 직접 접종되었고, 다른 이들은 연구를 감독하는 과학자들이 비용을 지불해 배치한 병든 매춘부와의 성관계 과정에서 감염되었다. 임질의 전파 경로 역시 함께 연구되었다. 실험은 1948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과테말라인들은 공식적인 사과를 받기 위해 2012년까지 무려 6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