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분쟁 중 하나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맞서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이 신생 강국을 몰락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렇기에 카르타고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카르타고와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공이 로마인임을 결정지었다. 길고 소모적인 제1차·제2차 포에니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투입하게 만들었고, 서로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전쟁인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사실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일 가치조차 없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계획된 살인이었다.
로마를 위협했던 강대국
카르타고 제국은 기원전 6세기 후반에 건국되었다. 이후 300년 동안 오늘날 튀니지에 해당하는 더욱 비옥한 땅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기원전 5~4세기에 그리스와 벌인 전쟁은 시칠리아 장악을 노리던 시라쿠사이 참주들의 야망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도시들과의 충돌을 꺼렸다. 이들에 대해서는 조약 체결이 제국의 핵심 정책이었다. 로마와의 첫 번째 조약은 공화정 수립 첫해에 체결되었는데, 당시 로마는 주로 육상 강국에 불과했다.
카르타고에 대한 선전포고는 로마가 아펜니노 반도 너머로 팽창을 시작하게 만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동시에 로마가 무력 충돌 개시를 망설였던 역사상 단 두 번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에게 해양 지배권을 안겨주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시칠리아에서 철수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는 또한 정복지에 대한 통치 전략도 재편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훨씬 극적인 상황에서 벌어졌지만,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카르타고는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아프리카 본토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여기에 극도로 가혹한 배상금(연간 약 5톤의 은, 50회 분할 납부)까지 지불해야 했으며, 로마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선포할 수 없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국력은 완전히 붕괴했다. 전쟁 이후 50년간 카르타고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로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신중한 외교 노선을 유지했다. 그런데 어째서 곧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까?
물방울이 바위를 파고든다
로마는 한동안 카르타고와의 새로운 전쟁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명분을 찾아냈다. 결정적 순간은 카르타고인들의 인내심이 바닥난 시기에 찾아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강요된 평화 조약에는 누미디아와의 국경 획정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마시니사 왕에게 "획정될 경계 안에서 마시니사 또는 그의 조상들에게 속했던 집, 땅, 도시 등 모든 것"을 반환해야 했다. 이처럼 추상적인 합의 탓에 마시니사는 끊임없이 더 많은 영토를 잠식했다. 결국 기원전 152년경 카르타고의 영토는 최소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로마 원로원은 이러한 잠식 행위를 합법화하거나 묵인했고, 결국 카르타고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누미디아의 침공이 있었을 때 그들은 무장하여 자신들의 땅을 방어했다. 원로원은 이를 빌미 삼아 제3차 포에니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스스로 무덤을 팔다
흥미롭게도 카르타고인들은 선전포고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항복 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적대 도시의 몰락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로마군이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했을 때도 카르타고인들은 여전히 비교적 평화로운 해결을 희망하며 공화국이 내리는 연이은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그들은 실제로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부과한 조건 중 하나는 도시 내 모든 무기를 반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명령은 도시를 떠나 약 15km 내륙 지방으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고대인들은 달리 판단했다. 바로 이 명령이 무장 해제된 시민들을 전투로 몰아넣은 것이다!
포에니 학살
전쟁의 결과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지만, 카르타고인들은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그들은 결의, 용기, 인내심으로 로마인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덕분에 로마의 명성에는 다소 얼룩이 남게 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처럼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먼저 포위군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도시에 있던 모든 로마 상인들을 살해하고 친로마파 정치인들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과 공격군 지휘부의 무능함 탓에 카르타고는 2년간 포위 상태가 이어졌지만, 전쟁은 좀처럼 종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장기전 끝에 결국 한니발을 격파했던 대(大)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인 소(小)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스키피오는 군대에게 집들을 불태우고 허물며 진격로를 열도록 명령했다. 거리 전투는 길고 처절한 6일간 계속되었고, 그동안 일부 병사들은 시신 처리 임무를 맡았다.
새 지휘관은 카르타고 영토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신속하게 포위망을 완벽히 봉쇄했다. 이로써 주민들을 보급선으로부터 차단했으며, 카르타고 기병대의 이탈까지 유도했다. 또한 총공격 직전에는 에보카티오(evocatio) 의식을 거행해, 도시를 수호하던 신들이 로마 편으로 넘어오게 했다고 선언했다.
거리 전투가 6일간 이어지는 동안 일부 병사들은 시신을 도시 밖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결국 약 5만 7천 명만이 살아남았으나 굶주림에 시달렸고, 그들의 운명은 노예 시장에서 결정되었다. 카르타고에는 아직 로마에 대한 배신자 무리가 남아 있었는데, 로마군은 그들을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했다.
사형 선고
도시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주민들은 가축처럼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폐허 위에서는 도시를 영원히 저주하는 의식까지 거행되었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대(大) 카토는 이 사건을 예방적 공격으로 해석하며, 카르타고인들이 로마 공격 가능성만으로도 전쟁 준비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선포의 근본 원인은 카르타고의 재부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카르타고 멸망 후 "로마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와 포옹 속에서 밤새도록 머물렀고, 이제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고 확신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이제야 다른 민족들을 안전하게 통치할 수 있고, 자신들의 도시의 존재를 확립했으며, 모든 승리 중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적대 도시의 학살이 오직 두려움만으로 촉발되었을 가능성이 있을까? 결코 아니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비롯한 훨씬 더 많은 요인이 이 결정에 작용했다.
참고 문헌
- Everitt A., Glory to Rome. How the empire was formed, Poznań 2020.
- Ziółkowski A., History of Rome, Poznań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