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체코슬로바키아는 왜 헤어졌을까? 하이픈 하나와 두 정치인의 야망

1990년 당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지닌 체코슬로바키아가 불과 2년 뒤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고 체코와 슬로바키아라는 두 나라로 갈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분리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두 정치인의 야망, 그리고 국호에 들어간 '하이픈' 하나였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열정적으로 공산주의를 타도했고, 구체제에 맞서 싸웠던 인사들이 이끄는 정당들이 연방의회에서 치러진 첫 자유선거에서 승리했다.

초기에는 민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없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 사이의 다소 불공평하게 짜여진 관계보다 풀어야 할 더 시급한 과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제가 뜻밖에도 1990년 3월 30일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불화의 씨앗, '하이픈'

바로 그날, 의회에서 새 국호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양측 대표들은 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슬로바키아 측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Czecho-Slovak Federative Republic)'을 주장했다. 하이픈은 두 공화국과 두 민족의 대등함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반면 체코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별난 발상이라 여겼고, 전통에도 어긋난다고 반발했다. 그들은 줄곧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왜 헤어졌을까? 하이픈 하나와 두 정치인의 야망

체코슬로바키아인가, 체코-슬로바키아인가? (사진: PANONIAN, 퍼블릭 도메인)

그 결과는? 체코슬로바키아는 역사상 유일하게 공식 국호가 두 개인 신생 국가가 되었다. 체코 측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슬로바키아 측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절충안은 몇 달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폭풍을 완전히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야망

무엇보다 양 공화국에서는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는 극도로 야심 찬 정치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슬로바키아 측에서는 민족주의 수사를 내세운 블라디미르 메치아르(Vladimír Mečiar)가, 체코 측에서는 비슷한 야망을 품은 바츨라프 클라우스(Václav Klaus)가 그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 모두 분열 조장형 정치인이었다. 급진적 구호를 앞세워 다음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정당을 내부부터 분열시켰다. 그리고 그 목표를 가장 쉽게 달성하는 방법이 체코-슬로바키아 갈등이라는 소재를 부추기는 것이라 확신했다. 실제로 슬로바키아에서는 체코인들이 슬로바키아인을 정치와 경제에서 의도적으로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반대로 많은 체코인들은 동쪽의 가난한 이웃을 '보조금으로 부양'하는 데 지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왜 헤어졌을까? 하이픈 하나와 두 정치인의 야망

투겐트하트 빌라에서 만난 메치아르와 클라우스.

레흐 코시엘략(Lech Kościelak)이 저서 『슬로바키아의 역사』에서 언급했듯이, 1992년 6월 5~6일에 치러진 다음 연방의회 선거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지키려는 결의를 보이지 않았거나, 오히려 국가 유지에 무관심했던' 정당들의 승리로 끝났다. 슬로바키아에서는 블라디미르 메치아르가 이끄는 '민주슬로바키아운동(HZDS)'이, 체코에서는 바츨라프 클라우스의 '시민민주당(ODS)'이 각각 승리했다.

메치아르와 클라우스 모두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 했는데, 단일 국가 안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두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를 구성하는 두 공화국의 총리가 된 뒤, 짧고 비공개적인 협상에 돌입한다.

협상은 다소 중립적인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모라비아 브르노에 위치한 유명한 현대주의 건축물, 투겐트하트 빌라였다. 여러 차례의 회동 끝에 메치아르와 클라우스는 공동 국가를 분할하고 두 개의 민족 국가를 세우는 세부 사항에 합의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왜 헤어졌을까? 하이픈 하나와 두 정치인의 야망

메치아르와 클라우스가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을 공식 확정하다.

국민들에게 묻지 않은 분리

1992년 12월 31일 자정에서 1993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했고 그 재산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2대 1 비율로 분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총리는 국가 분할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거부했다. 애초에 하벨은 슬로바키아 측의 반대로 1992년 7월 이미 직위를 잃은 상태였고, 새 연방 대통령은 끝내 선출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클라우스와 메치아르는 왜 이 중대한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반대했을까? 자유로운 투표가 실시되었다면 국가 분할안은 부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제이 흐발바(Andrzej Chwalba)가 저서 『세계사 1989-2011』에서 정확히 지적했듯이:

(...) 이후 몇 년간 두 민족 사이의 관계는 좋았고, 심지어 매우 좋았다. 체코산 스코다차는 체코에서나 슬로바키아에서나 똑같이 잘 팔렸다. (...) 체코인들은 기꺼이 브라티슬라바에서 공부했고, 슬로바키아인들은 더더욱 프라하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민족 호감도 순위에서는 슬로바키아에서 체코인이, 체코에서 슬로바키아인이 각각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왜 헤어졌을까? 하이픈 하나와 두 정치인의 야망

바츨라프 하벨은 두 총리에게 국민투표 실시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오늘날 여론조사에 따르면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에 만족한다고 답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3분의 1에 불과하다. 사실 1992년 당시에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지지한 이들은 명확하긴 해도 소수파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메치아르는 슬로바키아를 4년간 통치했고, 클라우스는 체코 총리로 5년, 의회 의장으로 4년을 지낸 뒤 2003년부터는 대통령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