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2년, 키프로스의 왕 야누스는 블라디스와프 야기에워에게 돈을 빌리려 하며 자신의 나라를 담보로 내걸었다. 이 제안은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아프로디테의 섬을 다스리던 그는 진심이었다. 어쨌든 한 연대기 작가를 믿는다면, 그는 1426년 7월 7일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그 날짜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을 것이다. 며칠 전, 키프로스는 술탄 바르스바이가 이끄는 이집트 함대의 공격을 받았다. 침략자들은 먼저 리마솔을 점령한 뒤, 야누스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키프로스인들은 이를 거부했고, 이집트 사절은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1426년 7월 7일, 키로키티아에서 기억에 남을 전투가 벌어졌다.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군대를 격파했다. 야누스는 창에 얼굴을 베였고, 아랍어로 "나는 왕이다!"라고 외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산 채로 포로가 되었다. 8월 13일, 이집트 군대는 카이로로 개선 입성했다. 머리를 민 채 다리에 족쇄를 찬 야누스는 맨발로 걸으며 거꾸로 뒤집힌 왕기를 끌고 가야 했다. 이후에는 맨등 당나귀를 태워졌는데, 가끔씩 내려 땅에 입을 맞추라는 굴욕까지 감수해야 했다.
돈과 공주의 혼인을 위한 키프로스
1427년, 야누스 왕은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 조건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천문학적인 몸값, 연간 공물 납부, 그리고 키프로스의 부왕이 된 이집트 술탄의 종주권 인정이 그것이었다. 각각 20만 두카트와 5천 두카트라는 금액은 당시의 물가(두카트의 가치가 시대와 지역마다 달랐으므로)로도,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도 정확히 환산하기 어렵다.
비교하자면,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노예 한 명의 값은 20~30두카트였다. 또한 일부 연구에 따르면 15세기 초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에 도브진 지역 매입 대가로 54,000두카트를 요구했다. 어느 쪽이든 야누스에게 부과된 금액은 키프로스 경제를 완전히 파탄낼 수준이었다. 게다가 공물은 키프로스 특산품인 낙타털과 염소털로 짠 고급 직물 '카멜롯'으로 지불해야 했다. 이를 통해 이집트는 키프로스의 중요한 수출 상품마저 장악해 나갔다.

키프로스의 야누스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야누스는 패배의 치욕을 씻고 이집트의 보호국 지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제노바, 베네치아, 교황, 비잔틴 황제 등 여러 곳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설령 누군가 키프로스인들의 운명을 걱정한다 해도, 실질적인 구원이 될 만큼의 도움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강력한 기독교 통치자, 즉 폴란드 국왕에게 호소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비스툴라 강변의 나라는 멀리 있었지만 완전히 낯선 땅은 아니었다. 왕실의 친척인 피터 1세는 한때 크라쿠프를 방문해 카지미에시 대왕을 알현한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야누스의 참모 중 한 명이 운명에 의해 키프로스에 흘러들어 온 기사 피오트르 오브 브닌이라는 점이었다. 폴란드행을 제안한 사람은 아마도 그였을 것이다.
1432년 3월, 키프로스 사절단은 비슐리차에서 블라디스와프 야기에워를 만났다. 예루살렘 왕국의 명예 원수인 노레스의 발드윈이 이끄는 2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20만 플로린의 차관을 빌려주는 대가로 폴란드 국왕은 키프로스를 담보로 확보하고,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 섬의 운영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며 수입의 3분의 2를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중세의 동맹답게 이 협약은 결혼으로 봉인되어야 했다. 야누스는 외아들 얀을 위해 야기에워의 딸 야드비가와의 혼사를 청했다.
대출도, 공주도 이루어지지 않다
그러나 혼사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주 야드비가는 이미 143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사실은 15세기 유럽의 정보 전달 속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야기에워는 딸이 살아 있었다면 그런 혼사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관과 섬 인수 문제에 대해서도 야기에워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는 자국 국경에 타타르족이 있다는 점을 들며, 남의 나라를 제 비용으로 지켜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키프로스인들은 이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1432년 6월 28일 또는 29일에 사망한 야누스 왕에게 이 답변을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폴란드가 키프로스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차관과 섬 인수 문제에 대해 야기에워는 거절했다. 그는 자국 국경에 타타르족이 있다는 점을 들며, 남의 나라를 제 비용으로 지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위의 이야기는 야누스의 절박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이지만, 동시에 '비스툴라 강변에는 거짓 기독교인이 다스린다'는 튜턴 기사단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국왕이 해외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잘 드러내 준다.
일부 역사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기에워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서, 즉 "유럽 최후의 이교도 제국"의 통치자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런데 50년 후의 그는 기독교의 수호자라 불릴 만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리투아니아와 사모기티아에 세례를 베풀었고(상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기독교 서방 세계를 타타르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냈으며, 1415년에는 곡물 지원으로 비잔틴 황제를 도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키프로스인들의 사절 파견은 더욱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외교였음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