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월 20일, 영국 왕위 계승자였던 21세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26세의 필립 공자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젊은 필립은 미래의 군주 배우자로서 적임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유한 땅도 없었고 한 푼의 여유 자금도 없었으며, 장모가 될 사람 역시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백성들을 크게 기쁘게 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음 열린 경사스러운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신혼부부에게서는 행복이 넘쳐흘렀고, 신부는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갓 결혼한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이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들은 환호를 터뜨렸습니다.
불운한 왕가의 후예
결혼 전 필립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자로 불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공(1882~1944)이었습니다. 이 군주는 1845년 아버지가 다스리던 덴마크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이름은 빌헬름이었습니다. 1862년 그리스인들이 그를 통치자로 선출했고, 젊은 왕자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1863년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인 루터교를 지킨 채 이름을 게오르기오스로 바꾸었습니다.

에든버러 공작 필립, 1921~2021
새 국왕은 독신이었기에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야 했습니다. 그는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손녀인 대공녀 올가 콘스탄티노브나를 아내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에 기반한 결혼이었지만, 동시에 게오르기오스 1세는 정교회 신자인 왕비가 같은 종교를 믿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올가와 게오르기오스의 후손들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자·공주 칭호를 갖게 되었습니다.
필립의 어머니 앨리스(1884~1969)는 바텐베르크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모계로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으며, 아버지는 헤센 공 알렉산더와 폴란드 출신 백작부인 율리아 하우케의 후손이었습니다. 이는 귀천상혼(신분이 다른 사람 사이의 결혼)이었기에 부부의 자녀들은 헤센 공자의 칭호를 가질 수 없었고, 대신 새로운 칭호인 '바텐베르크 공작'을 받았습니다.

바텐베르크 공주로 태어난 필립의 어머니 앨리스(1884~1969). 모계로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습니다.
앨리스는 귀엽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심각한 청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부모는 딸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 도왔습니다. 덕분에 앨리스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입술 읽기를 익힐 수 있었고,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후에는 그리스어까지 마스터했습니다!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한 사랑 이야기
유럽의 모든 통치 가문은 사실상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었습니다. 구성원들은 서로 알고 지냈고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다양한 의전 행사에서 만났습니다. 그렇기에 안드레아스와 앨리스의 만남은 필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02년 앨리스의 외숙부인 에드워드 7세 국왕이 두 사람의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1903년 10월 7일에는 신부의 고향인 다름슈타트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는데, 니콜라이 2세(그의 아내가 앨리스의 숙모였습니다)까지 축하하러 왔습니다.
부부는 그리스에 정착했고, 1904년부터 1914년 사이 네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평화로운 생활은 깨졌습니다.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은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집권하던 군주를 실추시키고 1917년 그리스 왕실 전체를 나라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1947년, 필립 공자와 엘리자베스 공주
안드레아스, 앨리스와 자녀들은 프랑스로 떠났지만, 망명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1920년 국왕과 가족들은 간신히 그리스로 돌아갈 수 있었고, 1921년 6월 10일 필립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은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1922년 정치적 격변으로 그리스 통치 왕조의 일원들은 다시금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 극적인 사건들은 앨리스의 정신 건강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그녀는 편집형 조현병 진단을 받아 폐쇄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안드레아스 공자는 아내의 처지를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정부를 두고 모나카로로 이주한 뒤 룰렛 도박에 빠져들었습니다.
방황하는 소년
어린 필립은 런던에 사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할머니는 독일식 칭호를 영국풍으로 들리는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었습니다. 필립의 누나들은 숙부와 숙모들이 돌봤습니다.
소년이 학령기에 이르자 평판 좋은 기숙학교에 보내졌습니다. 방학과 휴일에는 외할머니, 숙부 루이스 마운트배튼(훗날 인도 부왕) 또는 친척과 지인의 집을 전전했습니다. 그에게는 사실상 집이라 할 곳이 없었습니다. 여가를 함께 보낼 사람도 없었고 물건을 둘 곳조차 없어 짐은 늘 그와 함께 여행했습니다. 리처드 허프는 "그의 어린 시절은 끊임없이 짐을 꾸리는 일이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아들 찰스 왕자와 함께한 필립 공자
필립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자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영국 신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 왕실의 모든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1934년 사촌인 그리스의 마리나 공주와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결혼식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날 그는 미래의 아내를 처음 보았습니다. 당시 겨우 8살이었던 엘리자베스였습니다.
결혼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1939년에야 시작되었습니다. 13세의 엘리자베스가 숙부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저택에서 18세의 필립을 만난 것입니다. 그녀는 잘생긴 청년에게 즉시 반해 그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지만, 필립은 10대 소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달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필립이 해군에서 용감하게 싸우면서, 왕위 계승자의 마음속 그는 영웅의 이미지를 굳혀갔습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결혼을 주선한 이는 루이스 마운트배튼으로 전해집니다. 공주의 마음을 알아본 그는 이것이 조카와 자신 모두에게 기회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했고, 이는 필립의 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정략결혼이었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관식 이후의 엘리자베스와 필립
1947년 7월, 두 사람의 약혼이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왕위 계승자는 부모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했습니다. 필립에게는 돈도 없었고(약혼 당시 그의 재산은 고작 5파운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소속된 나라도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세 명의 누나의 남편들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심지어 독일 국방군에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장래의 장모는 특히 필립에게 냉담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뜻을 이루고 자신의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비록 동화 속 왕자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결혼 후에도 필립은 독신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냈고, 선정적인 파티에 자주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녀들이 어머니의 성씨인 윈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무거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자녀에게 자기 이름을 물려줄 수 없는 남자다"라고 불평했습니다. 남편의 좌절을 달래기 위해 1960년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자를 제외한 두 사람의 후손들이 '마운트배튼-윈저'라는 복합 성씨를 쓴다는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을까요? 두 사람은 "설명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에 그 답을 알 길은 없습니다.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2021년 4월 9일 윈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99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