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만도는 멋진 녀석들이야, 그런 군대라면 나도 인정하지!"
제2폴란드군단의 한 대위가 제1독립코만도중대의 씩씩한 병사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특수임무를 수행하던 이 정예 부대는 끊임없이 전투에 참여하는 동시에 술집에서 연합군 병사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들은 몬테카시노 공격에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1942년 8월, 영국은 이미 2년에 걸쳐 유명한 코만도 부대를 만들어 왔습니다. 마침내 폴란드인들도 "우리도 할 수 있다, 아니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은 폴란드 코만도 중대 창설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부대는 제10연합코만도에 편입되었으며, 소총소대 2개와 지휘소대 1개로 구성되어 총 114명 규모였습니다.

폴란드 코만도 지휘관 브와디스와프 스모로프스키(오른쪽)와 안데르스 장군.
부대원 중에는 폴란드, 프랑스, 노르웨이 전역의 참전 용사들이 많았고, 스페인 내전 경험자까지 있었습니다. 외인부대 출신 병사 몇 명과 양 대륙(미주)에서 온 자원병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초대 지휘관은 9월 전역과 프랑스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브와디스와프 스모로프스키 대위였습니다.
전우들과 함께하는 훈련만큼 좋은 것은 없다!
폴란드 코만도 중대의 훈련은 스코틀랜드 아크나캐리의 특수부대 훈련센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폴란드 병사들은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하는 장기 야외 생존 훈련, 각종 무기 다루기(적 무기 포함), 백병전, 조정, 항해, 등반 등을 단련했습니다.
특히 이른바 '조용한 작업', 즉 칼을 이용한 은밀한 제압 기술에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또한 병사들의 절반은 낙하산 훈련도 받았습니다.

훈련이 얼마나 프로페셔널했는지는 스코틀랜드의 한 선술집에서 벌어진 사건이 잘 보여줍니다. 여러 코만도 대원들이 그들을 미워하던 폴란드 포병들과 싸움을 벌였는데, 상대는 수적으로 크게 우세했습니다.
그 결과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출동한 경찰은 코만도 대원들을 구속하거나 벌금을 부과하는 것은커녕, 오히려 패배한 상대들을 인도를 막지 않도록 보도를 가로지르지 않고 세로로 눕히라고 지시했습니다. 영국식 꼼꼼함과 폴란드인의 뜨거운 피, 이보다 절묘한 조합이 있을까요?
1943년 9월, 폴란드 병사들은 알제리로 이동하여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아울러 텔 아틀라스 산맥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살려 산악 전술을 완성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이탈리아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이게 됩니다. 한편 아프리카에서 지루함을 느낀 폴란드인들의 불같은 성질은 여전히 드러났습니다. 술과 칼이 오간 몇 차례의 스캔들이 일어났고, 필리프빌에서는 왕립아일랜드근위대 병사들과 벌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좋은 것에는 끝이 있는 법. 1943년 12월 1일, 중대는 이탈리아 타란토에 상륙하여 제2코만도여단에 배속되었습니다.

코만도 부대의 훈련은 정말로 혹독했습니다. 병사들은 적진 뒤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연습했고, 그 결과는 술집 싸움에서도 값진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후 부대는 영국 제78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상그로 강 방어선에 배치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2월 21~22일 밤, 페스코펜나타로에 주둔하던 80명의 폴란드 병사들은 독일 산악병 200명의 공격을 받습니다. 폴란드 코만도는 단 세 명의 부상자만 내며 공격을 격퇴하고, 독일군 30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시켰습니다.
나치에게 돌멩이를 던지며 부르던 "폴란드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1944년 4월, 제1독립코만도중대는 제2폴란드군단에 편입되었습니다. 스모로프스키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했고, 부대는 필요한 보충도 받았습니다.
안데르스 장군 군단 소속으로서 폴란드 코만도의 첫 작전은 바로 몬테카시노 전투였습니다. 당시 중대에는 장교 15명과 병사 72명이 있었습니다. 군단 지휘부의 지침에 따라 코만도는 1944년 5월 11~12일 밤 첫 번째 폴란드 공격 직전에 독일군 진영에 침투하여 주변을 굽어보는 몬테 카이로의 관측소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취소되었고, 코만도 중대 병사들은 전투 데뷔를 위해 한 주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두 번째 몬테카시노 공격에서 폴란드 코만도의 주요 임무는 콜레 산탄젤로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제5크레시보병사단 작전 통제 하에 배속된 중대는 제15포즈난창기병연대의 강습 중대로 증강되어 스모로프스키 소령이 지휘하는 '코만도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길고 지칠 줄 모르는 훈련과 튀니지에서의 수개월 머무름 끝에, 폴란드 코만도는 1943년 12월 1일 아펜니노 반도에 도착했습니다.
콜레 산탄젤로에서 폴란드인들이 마주한 상대는 독일군의 정예, 제1낙하산엽병사단이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습니다. 피터 캐딕-애덤스는 저서 『몬테카시노: 열 개 군단의 지옥』에서 그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한된 보급 속에서 강하와 소규모 집단 전투를 위해 훈련된 자들[...], 인내심과 기지를 키우고, 명령 없이도 행동하며 압도적인 역경에 맞서도록 단련된 자들.
그렇다면 첫 공격 당시 폴란드인들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콜레 산탄젤로의 사면에서 탄약이 바닥나고 또 한 번의 역공을 받자, 한 선봉 중대[폴란드]는 사기를 북돋기 위해 폴란드 국가를 부르면서 독일군에게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피터 캐딕-애덤스, 『몬테카시노: 열 개 군단의 지옥』).
썩어가는 시체의 언덕
산탄젤로는 거대한 석재 벙커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소형 강철 조립식 벙커인 이른바 '필박스'까지 더해졌습니다. 게다가 바위 사이에는 독일 저격수들이 숨어 있었고, 전 지역이 독일 포병과 박격포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양측 모두 '죽음의 천사의 산'이라 불린 콜레 산탄젤로를 두고 벌인 싸움에서 함께 기억하는 디테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더위 속에 썩어가고 부패하는 시체 위를 들끓는 파리의 악취였습니다. 피터 캐딕-애덤스가 인용한 독일 낙하산부대원 쿠르트 베토 대위는 자신의 병사들이 5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시체에서 나는 참을 수 없는 악취 때문에 방독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몬테카시노의 폴란드 코만도는 정예 낙하산 엽병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 코만도들은 일반 보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격해야 했습니다. 코만도 그룹은 군단의 다른 부대들처럼 5월 17일 오전 7시에 공격을 시작합니다. 언덕 위에서 제706포즈난 강습 중대는 독일 포병의 살벌한 포화에 몸살을 앓고, 부상자 12명이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대열을 재정비한 폴란드군은 다시 공격합니다. 오후에는 명령 변경이 내려옵니다. 스모로프스키 소령의 그룹은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제16리비우엽병대대의 측면을 먼저 보호한 뒤, 제17리비우엽병대대와 함께 산탄젤로 북부를 타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3시경 코만도들은 적 기관총의 맹렬한 사격 아래 엎드립니다. 부상자가 속출합니다. 그럼에도 이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비극적 코미디 같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사브로프스키 하사가 저격수의 총탄에 눈가와 코 사이를 맞은 것입니다.
"총알이 뒤통수로 빠져나갔는지 좀 봐줘." — 사브로프스키 하사가 물었습니다.
동료는 즉답했습니다. — "바보 같으니, 구멍이 뚫렸으면 넌 이미 죽었겠지!"
산탄젤로에서 피흘리는 폴란드 보병
16시경 폴란드군은 산탄젤로를 다시 타격합니다. 코만도의 지원을 받은 제13, 16, 17엽병대대 병사들이 공격에 나섰고, 이는 합계 한 개 대대 규모의 전력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독일 박격포의 맹포화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군이 언덕의 일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정상은 여전히 독일군이 굳건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찾아온 밤은 전투를 멈추게 했고, 피투성이가 된 폴란드 대열을 점검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가 끝날 무렵 코만도의 전력은 장교 11명과 병사 54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폴란드인의 시선으로 그린 몬테카시노 전장 스케치. '죽음의 천사의 산'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자정이 지난 뒤, 붉은 십자기를 든 독일군 두 명이 폴란드 진지로 찾아와 부상자 후송을 요청했습니다. 합의에 따라 부상당한 독일 낙하산부대원 21명이 후방으로 후송되었습니다.
5월 18일 오전 9시 40분, 폴돌리아 창기병대가 폐허가 된 수도원에 입성할 때도 '죽음의 천사의 산'은 여전히 독일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10시, 폴란드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지만 정상 바로 앞에서 또다시 격퇴됩니다. 독일 낙하산부대원들은 끝까지 완강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은 폴란드인들이 포로를 잡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코만도와 운전병, 독일에 맞선 손잡이 싸움
스모로프스키 소령은 공격 지휘관 루드니키 대령과 연락을 확보하는 데 성공합니다. 스모로프스키는 코만도 그룹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보고했습니다. 36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없이 싸워왔고, 병사들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습니다. 루드니키 대령은 버티라는 명령을 내렸고, 스모로프스키는 명령을 실행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전투들은 코만도의 등반 훈련이 실전에서 매우 유용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오후 4시 20분, 폴란드 병사들은 또 한 번의 공격에 나섭니다. 코만도와 포즈난 창기병대뿐 아니라 전날 크게 감소한 엽병대대의 잔류 병력들도 공격에 동참했습니다. 루드니키 대령은 예비대 역시 이끌었습니다:
사단 대전차 및 대공 연대, 예비 운전병과 헌병, 그리고 소총이라도 쥘 수 있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예비대였습니다(피터 캐딕-애덤스, 『몬테카시노: 열 개 군단의 지옥』 인용).
한 시간 반 동안 전황은 이리저리 기울었습니다. 독일 포병이 다시 합세했고, 폴란드군은 흩날리는 암석 파편의 비를 맞으며 부상자가 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예비대가 발목을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코만도들은 오후 7시 30분까지 산탄젤로 거의 전체 정상을 장악했습니다. 30분 뒤 독일군이 철수한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점령한 능선 위에는 강력한 요새화된 전초진지가 구축되었습니다. 1944년 5월 19일, 두 발의 백색 신호 로켓이 '죽음의 천사의 산' 상공으로 치솟아 하늘에 상징적인 V자를 그려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