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약탈, 린치의 물결. 비극적인 오해와 이루어지지 못한 꿈들. 세계 최대의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은 많은 참전자들에게 생존하기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역시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요.
언제나처럼 이번 TOP10 순위의 모든 항목은 우리가 발행한 기사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의 종말기에 벌어진 극적인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관련 기사를 확인해 보세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날들, 누가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을까요…
10. 폴란드 여성들은 붉은 군대 병사들의 강간을 피하려고 스스로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이 주둔한 곳에서는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늙은 여성도, 어린 소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해방'한 이후, 어떤 여성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폴란드 여성들은 잠재적 가해자들을 속이기 위해 목도리로 몸을 감싸고 옷을 여러 겹 겹쳐 입었으며, 피부에 재를 문질러 바르기도 했습니다. 로키티노(Rokitno)에서는 한 어머니가 군인들의 시선을 끄는 딸의 긴 금발을 잘라버렸습니다. 그 소녀는 겨우 11살이었습니다 (자세히 읽기).
9. 붉은 군대 병사들은 먹을 수 없는 '진미'를 참지 못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이 샌드위치용 진미로 삼았던 니베아 크림.
굶주린 붉은 군대 병사들은 점령지에서 음식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맛보았습니다. 한 마을에서는 독일군이 남긴 기계 윤활유 한 통을 통째로 먹어 치웠는데, 그것을 마멀레이드 잼으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오슈미아나(Oszmiana)에서는 한 여성의 니베아 크림을 모두 빼앗아 빵에 발라 먹었습니다. 아마 특별한 향이 첨가된 라드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자세히 읽기).
8. 미국은 전쟁 재개 직전까지 몰렸다

일본 영토에 살포된 미국의 선전 전단은 천황의 신민들에게 낙관을 심어줄 수 없었습니다.
1945년 8월 19일, 항복 협상을 위해 이동하던 일본의 고위 장군들이 오키나와에 경유해 내렸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병력 하나뿐이었고, 장군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즉시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현장 지휘관들의 과민한 대응은 태평양 전쟁을 연장시킬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나름의 확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읽기).
7. 유럽에서 미군 병사들은 짐승처럼 행동했다

점령지 독일에서 미군 병사들은 붉은 군대보다 훨씬 낫지 않았습니다. 사진은 소련군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된 독일 여성들입니다.
1945년 봄 연합군이 독일에 진입하자, 미군 병사들은 저항하지 않는 한 약탈과 강간이 허용된다고 여겼습니다. 미국 검찰은 매주 약 500건의 강간 사건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약탈은 종종 오락거리처럼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는 미군이 구급차를 훔쳐 질주했는데, 차량 뒤쪽에서는 독일 의사가 산모를 출산시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읽기).
6. 제3제국의 항복 후에도 발트해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1945년 5월 1일 유럽 전선의 상황.
발트해에서의 마지막 교전은 헬(Hel) 반도와 비스와 사주(Mierzeja Wiślana)에서 벌어졌습니다. 헬 반도에는 약 20만 명의 독일군이 집결해 육로를 차단하고, 파괴된 기관차들로 방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5월 9일에야 항복했습니다. 비스와 사주 진지에 대한 소련군의 공습은 그로부터 3일 뒤에도 계속되었고, 결국 전투는 5월 13일에야 완전히 끝났습니다 (자세히 읽기).
5. 이탈리아에서는 진짜 파시스트 사냥이 벌어졌다

밀라노 피아차레 로레토의 주유소 앞에 거꾸로 매달린 베니토 무솔리니(왼쪽에서 두 번째), 클라라 페타치와 저명한 파시스트 세 명의 시신.
1945년 4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는 파르티잔에게 총살당했습니다. 시신은 밀라노로 운반되어 주유소 건물 앞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시신들은 곧 군중들에게 모욕당하고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전역이 피로 물든 복수의 열광에 빠져들었습니다. 파시스트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의심만 받은 사람조차 살해당했습니다 (자세히 읽기).
4. 캐나다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동이 일어났다

1945년 5월 8일, 캐나다 핼리팩스의 이발소 유리창이 깨진 모습.
1945년 5월 7일, 9천 명이 넘는 선원들이 캐나다 핼리팩스에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과밀해진 호텔에는 그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었습니다. 좌절한 병사들은 노면전차에 불을 지르고 창문을 부수며 주류점을 약탈했습니다. 상황이 통제된 것은 5월 8일 저녁에야였습니다. 이 사태로 3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2명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654개의 상점이 파손되었고 총 피해액은 500만 달러로 추산됩니다 (자세히 읽기).
3. 독일 여성들은 폴란드인들에게 강간당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지만, 유일한 위협은 아니었습니다.
폴란드군 병사들은 니저실레시아(하부 실레지아)의 도시들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붉은 군대 강간병들의 방식을 본떴습니다. 스클라르스카 포렝바(Szklarska Poręba)에서는 한 소녀가 여섯 명의 동포에게 희생되었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종종 폴란드군 '농장'에 끌려가 저녁마다 중위와 부사관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일부는 그곳에 몇 주씩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자세히 읽기).
2. NKVD 장교들은 아우슈비츠에 자체 수용소를 열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NKVD는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에 자체 수용소를 열었습니다.
이미 1945년 2월, 소련 당국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KL Auschwitz)에 두 개의 분소를 설립했습니다. 첫 번째 분소는 독일군 포로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 분소에는 실레지아인들이 수감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 이는 불구 또는 사망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도네츠크 분지로 추방된 실레지아인들에 대해 수용소 소장은 그들이 '이윤'을 위한 목적으로 보내진다고 말했습니다 (자세히 읽기).
1. 안데르스 장군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폴란드를 탈환할 계획이었다

몬테카시노 폐허 위의 폴란드 군인. 그는 바르샤바 승리 퍼레이드에서 국가를 연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1945년 5월, 서부 폴란드군 총사령관은 영국 원수 앨런 브룩과의 면담에서 폴란드로 진격해 소련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붉은 군대가 점령한 영토에 대한 공격 계획은 윈스턴 처칠이 직접 작성했으며, 이 작전의 코드명은 '언씽커블(Unthinkable)'이었습니다 (자세히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