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폴란드는 유럽 지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 국경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불평등한 싸움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폴란드인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독립의 대가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는 전 세계의 핵심 정치인과 외교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가 회담을 주도했습니다. 이 회의의 목적은 전후 유럽 상황을 정리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보장할 방안을 찾는 것이었으며,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에 대한 처벌과 새로운 유럽 국경 획정도 논의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1918년 말 재건된 폴란드 공화국의 대표단도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와 이그나치 파데레프스키(Ignacy Paderewski)가 폴란드 문제를 대변했고, 국내에서는 유제프 피우수츠키(Józef Piłsudski)가 임시로 국정을 맡았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123년 만에 되살아난 국가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레크 레즐러(Marek Rezler)가 저서 『폴란드 독립 1918』에서 밝힌 것처럼 말입니다.
"폴란드 땅은 매우 무거운 부담을 안고 독립을 맞이했습니다. 외국 군복을 입고 전장에서, 종종 자국민과 싸우면서 약 45만 명의 폴란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장 많은 폴란드인의 피가 흘러든 곳은 동부 국경 방어전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볼셰비키 전쟁은 극도로 참혹했습니다.
폴란드-볼셰비키 전쟁, 피로 물든 수확
그러나 재건된 폴란드의 기초를 놓기 위해 치른 희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논쟁이 시작될 무렵, 동쪽에서 치명적인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서방 열강들은 폴란드 서부 국경 문제를 다루면서도 러시아와의 국경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랜 동맹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구 차르 제국에서는 위험한 정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지자들이 혁명으로 도입한 공산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이미 팽창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우수츠키는 이를 인지하고 미리 전투 준비에 나섰습니다.
마레크 레즐러 역시 이 전쟁이 불가피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는 『폴란드 독립 1918』에서 "당시 상황에서 약함, 체념, 후퇴는 적의 팽창을 위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싸움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적었습니다.
폴란드-볼셰비키 전쟁은 1919년 초 발발하여 1921년까지 단속적으로 이어졌고, 리가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폴란드와 볼셰비키 러시아 사이의 국경선을 최종 확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젊은 국가는 패망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동쪽에서 진격하는 적군은 바르샤바 인근까지 육박했고, 비프시 강(Wieprz)에서 시작된 반격만이 그들을 격퇴시켰습니다. 안타깝게도 독립 방어의 대가는 매우 컸습니다. 폴란드 측 사망자는 약 6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많은 폴란드인이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생명을 바쳤지만, 큰 희생을 낳은 분쟁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동부 소폴란드와 볼히니아에서도 동부 국경의 모습을 결정짓기 위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전쟁 종식 후 새롭게 등장한 독립 우크라이나가 이 땅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고, 폴란드와의 전쟁은 1918년 11월부터 1919년 7월까지 이어졌습니다.
보이치에흐 코사크(Wojciech Kossak)의 그림 「리비우의 독수리들」
폴란드 공화국 편에는 군인뿐 아니라 주로 도시 주민들로 구성된 비군사 자원봉사자들도 가담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싸운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 폴란드-볼셰비키 전쟁에서 붉은 군대와의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특히 '리비우의 독수리들'이 참전한 리비우의 영웅적인 방어전은 역사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학생, 스카우트 소년소녀들로 이루어진 자원 부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웃 국가와의 분쟁에서 희생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최대 1만 명의 폴란드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결국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의 동부 국경을 위해 약 7만 명을 잃은 셈입니다.
서부 국경에서의 봉기 희생
서부 국경 획정은 더 평화로울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서부 국경의 성립은 서방 열강의 통제 아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곳에서도 폴란드인의 피가 흘렀습니다. 대폴란드(Wielkopolska) 지역에서는 전후 독일의 탄압과 폴란드 국기 모독 사건들이 큰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효율적이고 잘 조직된 정치 행동의 모범으로 꼽히는 봉기로 번졌습니다.
봉기의 성공은 능률적인 외교 노력으로 굳혀졌고, 거의 대폴란드 전역을 폴란드 영토로 편입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군사 작전은 열강들의 최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봉기가 없었다면 폴란드는 이 사안에서 패배하고 분쟁 지역은 독일 영토로 남았을 수 있습니다.
"당시 정치적 현실에서 이 승리한 봉기는 필수적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 폴란드의 서부 국경은 제2차 폴란드 분할 이전 공화국의 국경과 흡사해졌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관례에 따라 분쟁 지역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레슈노와 라비치를 포함한 대폴란드 북부, 서부, 남부의 많은 군(poviat)이 독일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대폴란드 봉기는 완전한 승리로 끝난 몇 안 되는 폴란드 무장 봉기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봉기의 성공에는 필연적으로 피가 따랐지만, 상황상 희생자 수는 동부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2008년 비에스와프 올셰프스키(Wiesław Olszewski)와 우카시 야스트샹브(Łukasz Jastrząb)는 '대폴란드 봉기 희생자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이는 제2차 폴란드 공화국 국경 수호전에서 순국한 이들에 관한 가장 정확한 데이터 중 하나로, 명단에는 2,289명이 올라 있습니다.
실레시아(Silesia)에서도 죽음이 사람들을 거두어 갔습니다. 독일의 탄압과 폴란드 입장에서 불공정하고 불리하게 진행된 실레시아 주민투표 결과는 세 차례의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다행히 이 봉기 덕분에 폴란드는 원자재가 풍부한 이 지역의 일부를 확보하는 협약에 서명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봉기들의 경우 정확한 수치를 확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마지막 봉기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으며, 전투 과정에서 1,218명의 봉기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 희생 집계
1918~1921년 사이 전사자 명단을 오늘날 온전히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종된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 상당수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에치스와프 브조섹(Mieczysław Wrzosek)은 실종자가 5만 명을 넘는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장교, 부사관,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일반 병사를 포함해 확실히 사망한 폴란드인이 또 5만 명입니다.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의 국경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무려 25만 명의 폴란드 병사가 전사, 부상 또는 실종되었습니다!
부상자 통계도 경각심을 불러일 만합니다. 브조섹의 계산에 따르면 국경 전투가 끝난 후 부상자는 무려 약 12만 명에 달했습니다. 많은 폴란드 병사가 부상으로 인해 복무로 복귀하지 못했고, 몸이 불구가 된 이들과 전쟁 신경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망, 부상, 실종자를 모두 합치면 무려 25만 명에 이릅니다. 게다가 이 수치에는 민간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겨우 재건된 폴란드에게 이는 감당하기 힘든 인구학적 부담이었고, 전투에서 입은 손실은 이후 수년에 걸쳐 메워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폴란드 병사들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점은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헌신이 없었다면 최종적으로 제2차 폴란드 공화국에 귀속된 광대한 땅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국경 밖에 남겨졌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