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기병(위사르)은 전장의 사기꾼이라 불렸다. 오만하기 짝이 없고 위험을 갈구하는 이들은 용기와 재치, 기발한 작전으로 전설이 되었지만, 1795년에는 스스로의 한계마저 뛰어넘었다. 결빙된 바다 위를 달려 함대를 통째로 나포한 것이다.
1793년, 파리의 단두대가 내뿜는 처형대의 비명은 유럽 군주들을 전율하게 했다. 1년 전 결성된 대프랑스 동맹은 프랑스에 질서를 회복하고 혁명 사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활동을 한층 강화했다. 외국 군대는 다시금 프랑스 국경에 도열했다. 여기에 지금까지 대륙 문제에 비교적 무관심했던 영국도 이번에는 상당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동맹을 지원했다. 알비온(영국)의 재정 후원 덕분에 프랑스 시골의 왕당파 반란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전쟁의 열기 속에 있는 프랑스
프랑스는 신규 징집으로 맞섰다. 1793년 2월 국민공회의 법령은 30만 명의 병력 동원을 명령했지만, 곧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공안위원회는 같은 해 4월, 18~25세 남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렇게 방대한 군대를 먹이고 무장시키려면 끊임없는 공세를 이어가 적 영토에서 자급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다. 벨기에를 내주어야 했고, 남부와 서부에서는 왕당파 반란이 들끓었다. 그러나 연말이 되자 새롭게 창설된 대군과 반역자 집단 사살까지 허용하는 가혹한 국내 정책 덕분에 침략자를 밀어내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연말 무렵 프랑스군은 모든 전선에서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1794년 봄, 동맹국들이 결정적인 역공에 나설 것처럼 보였다. 벨기에 방면과 모젤 방면에서 협공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계획은 폐기되고 방어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 프랑스군은 국경에서 에스파냐군을 몰아내 카탈루냐로 진격했다. 북부 전선에서는 5월 코르트레이크와 투르쿠엉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6월 플뢰뤼스 전투의 승리는 동맹군이 이 전선에서 더 이상 결연한 전의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동맹군은 점차 벨기에에서 철수했고, 12월에는 프랑스군이 네덜란드 공화국(연합주 공화국) 국경에 도달했다.

플뢰뤼스 전투
완벽한 타이밍, 분열된 네덜란드
동맹국 하나의 나라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였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한동안 내부 권력 다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라녜파는 유명한 오라녜 공 빌럼에게서 이어지는 총독(스타트홀더) 계승 세력을 지지했고, 애국파는 공화제 이념에 집착하며 총독 권력이 없는 나라를 원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혁명 프랑스군은 침략자라기보다 오히려 해방자처럼 보였다. 여기에 귀족과 상인으로 구성된 과두정치 세력인 섭정파(regents)도 있었다.
세 집단 간의 정치적 분쟁은 피셰그루(Pichegru) 장군의 침공 부대가 큰 저항 없이 진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795년 1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 애국파의 공개 반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 총독 빌럼 5세는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하루 뒤 프랑스군이 도시에 입성했고, 파리에 종속된 바타비아 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정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라의 일부는 여전히 빌럼의 지지 세력이 다스리고 있었다. 북진을 계속하던 피셰그루 장군에게 급보가 들어왔다. 네덜란드 함대의 선박들이 결빙된 즈위더르해 만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함대 지휘관 레인티예스(Reintjes) 대위는 덴헬더 항을 떠나 영국군이 이미 나포한 다른 선박들과 합류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출항이 늦었고, 날씨마저 계획 실행을 가로막았다. 그해 겨울은 극심한 혹한이었고, 배들은 항구와 텍셀 섬 사이 해협에서 얼음에 갇힌 채 꼼짝할 수 없었다.
얼음 위의 호위기병
함포 850문을 실은 군함 14척과 이를 호위하는 상선 20척을 손에 넣을 기회는 그야말로 천편일각이었다. 피셰그루는 이 임무를 드윈터(de Winter) 장군에게 맡겼다. 프랑스군에 복무 중이던 이 네덜란드 출신 장군은 해군 경험이 있었다(연합주 공화국 군에서 해군 장교로 복무). 그래서 적임자로 여겨졌다. 1월 22일 밤이 되기 전, 프랑스군은 덴헬더에 접근해 야영을 치렀다.
현지 주민들은 프랑스군에게 항구 주변 해역이 매우 얕고 얼음이 두꺼워 기병 연대 하나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알렸다. 하지만 정박된 함대는 여전히 거대한 위협이었다. 네덜란드군은 포병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드윈터의 부대를 손쉽게 섬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면 공격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결국 레인티예스의 선원들을 기습하기로 하고, 얼음 위 은밀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라튀르(Lahure) 대령의 지휘 아래 제8호위기병연대와 제15보병연대, 총 약 2천 명이 투입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호위기병(1804)
1월 23일 새벽, 호위기병들은 얼음 위를 행군하며 네덜란드 함대를 향해 나아갔다. 기병 한 명마다 보병 한 명을 등에 업고 갔고, 말굽에는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천을 감았다. 이 기만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얼음은 호위기병의 진격을 끝까지 견뎌냈다. 네덜란드 함선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라튀르의 병사들은 신속히 갑판에 올랐고, 기습을 당한 네덜란드 선원들은 저항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한 드윈터 장군은 레인티예스 함대의 승무원들에게 혁명 프랑스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맹세를 받았다.
승자가 쓴 극적인 이야기, 그리고 좀 더 담백한 진실
여기까지가 승자가 기록한 극적인 1월의 이야기다. 그러나 즈위더르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물론 네덜란드 함선들은 자연의 힘에 갇혔고, 레인티예스 대위 역시 다가오는 프랑스군의 위협을 잘 알고 있었다. 1월 22일 저녁, 그는 항구 주변에서 드윈터의 병사들이 피워 올린 수많은 모닥불을 지켜보았다. 그는 항복하지 않고 싸울 생각이었다. 어차피 함포 850문과 병력 5천 명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정 무렵 암스테르담이 프랑스군에 함락되고 애국파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함대를 프랑스에 넘겼다.
어느 쪽을 믿든, 텍셀에서 벌어진 이 작전은 네덜란드 정복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리고 얼어붙은 바다 위를 가로질러 함대를 나포한 대담한 행군은, 나폴레옹 눈에 비친 호위기병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 앞에서는 무엇이든 물러섰다. 설령… 얼음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