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벨베르크의 '피의 신부': 70년간 은폐된 네덜란드 최대 신비주의 사건의 비밀

1937년, 한 젊은 여성의 신비주의적 체험이 네덜란드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1951년, 이 이야기는 철저히 덮여 버립니다. 70년 후 민족학자 페터 얀 마르흐리(Peter Jan Margry)는 바티칸까지 이르는 모든 기록 문서를 확보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소박하고 담백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에서 그런 일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의 눈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몸에는 십자가형의 상흔인 성흔(stigmata)이 나타난 것입니다. 얀스케(Janske)라 불리던 이 여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나 동일시되어 그의 수난의 상처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다고 믿었고, 동시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신부'라 칭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1937년 대중에 알려졌고, 얀스케가 살던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 벨베르크(Welberg)로 수많은 신앙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얀스케의 신비 체험을 알게 된 사람은 본당 신부 아드리아누스 에르멘(Adrianus Ermen)이었습니다. 성모와 그리스도의 현현, 악마의 방문까지 목격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그가 언론에 흘린 것입니다.

"에르멘 신부가 얀스케의 방에 들어섰을 때, 악마가 있었다는 타는 듯한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민족학자 마르흐리는 말합니다. 그는 수년간의 기록 연구 끝에 '벨베르크의 피의 신부'를 다룬 책 『불타는 사랑(Fiery Love)』을 집필했으며, 에르멘 신부가 남긴 방대한 필기를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만큼이나 마르흐리의 기록 추적 과정 또한 마치 단 브라운 소설 같은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왜 하필 1951년, 이 사건은 삼중 금고 속으로 사라져 은폐되었던 걸까요?

무스켄스 주교의 결정적 허가

의문이 제기된 것은 1990년대, 마르흐리가 메르텐스 연구소(Meertens Instituut)의 대규모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네덜란드 순례지를 조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얀스케 고리센(Janske Gorissen)의 기록 문서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여러 차례 브레다 교구의 기록 열람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돌파구는 2000년에 열렸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성년(聖年)'으로 선포한 해였고, 마르흐리가 안식년 연구로 로마에 머물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주교들이 종종 머물던 연구 공간을 찾았고, 어느 날 잔을 나누던 자리에서 우연히 당시 브레다 교구의 주교였던 티니 무스켄스(Tiny Muskens) 옆에 앉게 됩니다. 무스켄스 주교는 전임자들과 달리 얀스케 고리센 파일을 둘러싼 민감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고, 바로 그 성년에 기록 열람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봉쇄된 로마에서 열람을 마치다

연구자는 서둘러야 했습니다. 무스켄스 주교가 병을 얻으면서 후임자 아래에서도 허가가 유효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방문은 작은 아쉬움으로 끝났다고 마르흐리는 전합니다. "브레다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지만, 성청(Holy Office), 즉 옛 종교재판소의 최종 보고서가 없었습니다. 빈 봉투만 발견했죠. 보고서 원본은 오랫동안 폐쇄될 예정이던 로마의 기록 보관소에 있었습니다."

이 좌절로 마르흐리는 한동안 다른 연구에 매몰됩니다. 그러다 2019년,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쟁기(戰爭期) 관련 기록을 예정보다 앞당겨 2020년 3월 2일부터 개방하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벨베르크 파일도 공개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르흐리는 즉시 열람을 신청하고 3월 초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바로 그날 이탈리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봉쇄에 들어갑니다. "바티칸이 이미 완전히 잠긴 상태였는데도, 저는 몇 일간 옆문을 통해 출입이 허용됐습니다. 보고 싶었던 모든 것, 최종 보고서까지 전부 찾았습니다." 긴 추적이 마침내 완결된 순간이었습니다.

본당 신부 에르멘이 만든 '현상'

이렇게 확보한 기록 문서를 통해 마르흐리는 줄곧 비밀에 부쳐졌던 얀스케 고리센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에르멘 신부의 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기록된 내용이 워낙 많고, 너무나 기괴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디테일이 놀라울 정도로 풍부합니다. 직접 읽어보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르흐리에 따르면, 그 필기를 통해 에르멘이라는 인물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현상(現象)'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대로 보입니다. 이 신부는 악마와 현현에 대해 순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죠. 신학교 시절 동기들은 이미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현현이 나타난다면, 그건 반드시 저 녀석일 거다.' 그만큼 그는 그런 것에 잘 반응하는 사람이었고,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셈입니다."

신앙의 '어머니 고해자'가 된 얀스케

1937년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둑이 터졌습니다. 대규모 신앙인 행렬이 벨베르크로 몰려들었습니다. "얀스케의 신비주의적 은총 중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 그들이 가톨릭 교회의 계율을 지키고 있는지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사제들 사이에서 배교와 회의가 점차 흔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종의 '어머니 고해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는 교리에 어긋나는 지위였죠. 정절에 의문을 품은 수녀들, 독신 서원을 지키지 못하거나 무시하고 연인 관계를 유지한 본당 신부들과 부제들까지, 모두 위로를 받으러 얀스케를 찾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신비주의적 계시가 보고되면 가톨릭 교회는 철저한 조사를 거친 뒤 주교가 진위 여부를 공식 발표합니다. 그러나 얀스케의 경우 그런 절차는 생략되었습니다. 마르흐리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그녀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은총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꼽습니다. "브레다의 주교는 벨베르크를 한 번 방문했습니다. 그녀를 만나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완전히 확신에 차 있었죠. '이토록 특별한 신비가는 전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어떠한 정식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르흐리는 이른바 '집단 환영'이 유지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으로 유럽의 상황을 지목합니다. 당시 유럽 곳곳에서는 이런 유형의 신비주의 인물들이 종종 나타났지만, 네덜란드만은 한 번도 그런 붐에 휩쓸린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 맞춰 살아야 했던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묘한 로마풍의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개신교 쪽에서 항의가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는 이런 신비 현상에 대한 강렬한 갈증이 존재했습니다. 이곳의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이 극히 진지해서 교황보다 더 가톨릭적이라 할 만큼이었고, 때로는 자신들에게도 현현이 나타나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얀스케는 빠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끈적한 클럽'과 스캔들

한편 주교는 결정을 미루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고, 숭배 열풍은 통제 불능으로 치달아 결국 로마의 성청에까지 정보가 전해집니다. "성청은 소수의 조사관들을 파견했지만, 그들 모두 열정적인 찬사를 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마르흐리는 말합니다.

당시 바티칸에는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상당히 악명 높은 네덜란드 출신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이어진 숭배 열풍을 신속히 정리하는 데 성공합니다. 1946년 벨베르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는데, 그 이유는 얀스케와 에르멘을 중심으로 'het clubke'(작은 클럽)라 불리는 분파적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얀스케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포옹과 입맞춤을 받으며,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아주 '끈적한 클럽'이 형성된 것이죠. 그리고 그 와중에 본당 신부와 신비가 사이에 육체적인 '불타는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두 사람은 결국 로마의 네덜란드 대표단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고백합니다."

수십 년간 손대지 않은 기록, 그리고 완전한 은폐

그 순간 에르멘은 책임을 물어 일시적으로 직무가 정지됩니다. 1950년 얀스케 고리센에 대한 최종 보고서가 완성되었고, 파일은 봉인되었습니다. 이후 위트레흐트의 데 용(De Jong) 추기경은 네덜란드의 모든 주교들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록 문서를 폐기하거나 브레다 교구에 인도하여 금고에 보관하고, 이 문제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완전한 은폐였습니다. 벨베르크의 주민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황당함 속에 방치되었습니다. "기록은 수십 년간 손대지 않은 채 방치되었습니다. 기록 관리조차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죠. 제가 열람을 허가받을 때까지요."

이 사건으로 가톨릭 교회와 벨베르크 주민들이 입은 상처는 지금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듯합니다. 실제로 최근에도 브레다의 현직 주교는 마르흐리의 책을 받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 역할은 교구의 보좌 주교가 대신했는데, 그는 이 책을 호평하며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벨베르크에서처럼 가톨릭 교회를 분열로 몰아넣었던 신비 현상의 매력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지금도 성모나 그리스도를 목격했다거나 성흔을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르흐리는 저서 『불타는 사랑: 벨베르크 피의 신부의 비밀(Fiery Love. The secret of Welberg's Bloody Bride)』을 통해 신앙이 지역 차원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비판 능력을 잃고 집단 환상, 혹은 집단적 광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루르드(Lourdes)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성흔 사례와 현현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한 모범 사례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