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국부가 되기 전, '어린 윌리엄' 전시로 보는 빌럼 판 오라녜의 형성기

스페인 지배에 맞선 네덜란드의 항쟁은 올해로 450주년을 맞이한다. 네덜란드 국립군사박물관(National Military Museum)은 젊은 시절의 빌럼 판 오라녜나사우(Willem van Oranje-Nassau)를 주제로 한 특별전을 통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 새로운 연구 결과는 빌럼이 어떻게 네덜란드의 '국부(國父)'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빌럼(Willem)' 전시는 빌럼 판 오라녜나사우(1533~1584)의 형성기 초기 시절과, 그것이 올해 450주년을 맞는 항쟁(1568~1648), 이른바 80년 전쟁에 남긴 영향을 조명한다. 이 시기를 설명하는 유물 중 일부는 국립군사박물관 소장품으로, 갑옷·랜스(창)·권총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왕실 문서보관소와 스페인 등에서 빌려온 자료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오라녜 공작 빌럼

전시 공간은 성(城)을 표현하고자 골판지 벽으로 구획되어 있다. 콘크리트와 강철이 가득한 거대한 격납고 같은 국립군사박물관에서 이를 온전히 체감하기는 어렵지만, 관람은 빌럼의 어린 시절을 다룬 방부터 시작된다. 열한 살이던 그는 숙부 르네 판 샬롱(René van Chalon)으로부터 프랑스의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전쟁 중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빌럼을 샬롱의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명한 원본 유언장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작이 된 빌럼은 황제 카를 5세의 브뤼셀 궁정에서 교육을 이어갔다. 연구를 수행한 큐레이터이자 역사학자인 예론 푼트(Jeroen Punt)와 루이 슬로오스(Louis Sloos)에 따르면, 이는 귀족 가문의 소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군인 커리어 준비 과정이었다. 푼트는 "빌럼은 한쪽 발은 인문주의와 새로운 종교(개신교)라는 근대에, 다른 한쪽 발은 귀족 교육과 궁정 예법이라는 중세에 깊숙이 닿아 있었다"고 설명한다.

가장 예의 바른 기사

사냥, 토너먼트 참가, 당대의 유행 패션과 그에 딸린 무기, 노래와 춤, 궁정 예법까지 전시장 곳곳에 빌럼의 세계가 펼쳐진다. 눈길을 끄는 것은 '팀 오라녜'의 점수표다. 빌럼은 1561년 토너먼트에서 팀의 주장을 맡았는데, 그로부터 10년 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미 토너먼트 최고의 예의를 갖춘 기사에게 주는 상을 받은 바 있다.

소위 '기사의 홀'에는 브레다 나사우 성의 폐기물 처리구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을 늘어놓은 탁자가 있다. 여기에는 연회와 잔치의 최고 별미였던 백조 파이의 흔적이 보인다. 파이를 장식하기 위해 날개가 잘려 나갔다고 한다. 빌럼이 직접 사용한 식칼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그가 이 칼로 백조 파이를 잘랐을 것이라고 상상하면 묘한 감회가 새삼스럽다.

군인으로서의 첫걸음

1551년 열여덟 살이 된 빌럼은 곧바로 군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섭정 마리아 오브 헝가리는 그에게 경험이 풍부한 기병을 모집하고 지휘할 수 있는 대위 겸 사령관의 위임장을 하사했다. 이 임명장과 함께 정예 기병 부대인 랜서(lancer)의 갑옷도 전시에 포함되어 있다.

전시된 말은 박제 동물이 19세기 이후의 것만 확보 가능하기 때문에 16세기 유물은 아니지만, 마구와 투구, 그리고 길이 3.5미터에 달하는 랜스는 원본이다. 이 랜스는 그 시대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원본 중 하나다.

우연히도 군 경력이 시작된 직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푼트는 "이 대규모 전쟁은 7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동안 빌럼은 주로 전장에 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훗날 항쟁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군사 경험을 쌓았다"고 말한다.

1555년 카를 5세는 빌럼을 프랑스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총사령관의 지휘봉을 받았고, 같은 해 그 지휘봉을 든 모습으로 초상화가 그려졌다. 이 유명한 그림 앞에서 나는 빌럼이 스물두 살이라는 얼마나 어린 나이였는지를 실감한다. 그 역시 수많은 병사를 지휘하는 일이 두렵다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재능 있는 협상가

젊은 공작은 총사령관 선임 과정에서 카를 5세의 군사 참모들이 택한 인물은 아니었다. 빌럼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신중함 덕분이었다. 슬로오스는 "빌럼은 무모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며, 다른 방도가 없을 때만 싸우겠다는 신념을 이미 입증했다. 예컨대 우리 연구에 따르면 1555년 빌럼은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로크루아(Rocroi) 정복 명령을 받았으나, 그 도시를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며 상관들을 설득해 명령을 철회시켰다"고 밝힌다.

빌럼은 1559년 강화 회담에도 참석했다. 카를 5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필리프 2세는 그에게 양측 간의 중재라는 개인적 임무를 맡겼고, 그 결과 카토-캉브레지 조약(Peace of Cateau-Cambrésis)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문도 전시되어 있다. 높은 출신과 전장 경험에 더해 협상가로서의 역량까지 갖춘 빌럼에게, 훗날 항쟁기의 리더 역할이 돌아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항쟁의 시작

스페인 주군에 오랫동안 충성을 다했던 빌럼은 마침내 그에게 맞서기로 한다.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리프 2세는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빌럼은 무분별한 행동이 필리프의 보복을 불러올까 두려워 최대한 무력 충돌을 피해왔다. 그러나 스페인의 폭압이 거듭되자 그는 마침내 행동에 나섰고,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진군했다.

오늘날 우리는 1568년 5월 23일의 헤일리허를러 전투(Battle of Heiligerlee)를 80년 전쟁의 시작점으로 기억한다. 이 전투에서 빌럼의 군대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전시된 빌럼의 동생 루드베이크(Lodewijk)의 갑옷에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루드베이크는 그해 스페인군이 압도적인 전투에서 갑옷을 벗고 물길을 통해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는 1574년 무커헤이더(Mookerheide)의 또 다른 유명한 전투에서 형제 헨드릭(Hendrik)과 함께 전사했다. 형제 아돌프(Adolf)는 이미 헤일리허를러에서 숨졌고, 빌럼은 짧은 시간 동안 네덜란드의 양심의 자유를 위해 세 명의 동생을 잃었다.

지휘봉, 전시의 백미

전시의 절대적인 하이라이트는 단연 빌럼 판 오라녜가 직접 사용한 지휘봉이다. 처음에는 '역시 그의 지휘봉이구나!'라며 반가웠지만, 슬로오스가 나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알아채고는 이것 역시 매우 특별한 유물이라고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아는 한, 빌럼의 곁에서 사용된 다른 지휘봉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스페인군이 무커헤이더 전투 이후 이 지휘봉을 전리품으로 가져갔고, 그 후 수 세기 동안 바르셀로나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슬로오스는 "빌럼 판 오라녜는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중한 행동은 종종 간과되는 수년간의 군사 경험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기꺼이 전력을 다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빌럼은 그 전쟁의 결말을 지켜보지 못했다. 필리프 2세는 1580년 그를 반역죄로 공민(公民) 선고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에게 25,000금 크라운과 귀족 작위를 약속했다. 결국 1584년, 발타자르 게라르츠(Balthasar Gerards)가 델프트에서 빌럼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