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의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 1495) 세부 묘사: 그림 속 두 청년은 당시 유행하던 전형적인 15세기식 밀착형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 기록된 15세기 패션
이미지에 담긴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루카 시뇨렐리의 대표작 동방박사의 경배(1495)의 한 부분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두 젊은이가 입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시 유행하던 칼차브라가(Calzabraga), 즉 오늘날의 레깅스와 흡사한 밀착형 하의다.
'레깅스'의 선구자, 칼차브라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칼차브라가는 일종의 '선구적 레깅스'였으며, 이 시기에는 엄격히 남성 전용 의복이었다. 다리와 엉덩이를 완벽하게 감싸며 몸에 아주 밀착되는 형태가 특징이었다.
이러한 밀착형 스타킹은 이전 시대의 분리형 양말에서 진화한 것이다. 분리형 양말 역시 남성 전용이었지만, 무릎 위로 올라오지 않아 '속옷'이 그대로 드러나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다. 칼차브라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세련된 실루엣을 완성했다.
색과 무늬에 담긴 문장(紋章)의 언어
새롭게 등장한 이 타이트한 '바지'는 화려한 색상과 상당히 파격적인 무늬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었다. 색과 문양에는 매우 정교한 문장학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착용자가 속한 가문의 휘장에서 색상과 무늬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소속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시각적 언어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원리가 반대로도 적용됐다는 사실이다. 특정 가문의 색을 입는다는 것은 때로 낮은 사회적 지위, 즉 그 가문에 종속된 신분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즉 칼차브라가는 권력과 충성, 계급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였던 것이다.
16세기까지 이어진 유행
칼차브라가는 16세기까지 꾸준히 유행하며 르네상스 시대 남성 패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레깅스가 사실 500년 이전 유럽 남성들의 옷장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은, 패션이 시대를 넘어 순환한다는 진리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