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로마 문헌 속 게르만 신들: 접촉 이후 로마적 색채를 띠게 된 고대 네덜란드의 신앙

고대의 종교는 '고전 주간(Week of the Classics)'의 주제다. 하지만 서기 초기, 오늘날 네덜란드 땅에 살았던 게르만족의 신들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을까?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신을 조각상으로 만들지 않았고,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로마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그들은 로마인에게서 여러 가지 관습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은 제국 북방 국경인 라인 강 유역의 주민들을 '투턴족(Teutons)'이라 불렀다. 이들 안에는 다양한 부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라인 강과 발 강 사이에 살던 바타비족(Batavians)과 북부의 프리시아족(Frisians)이 대표적이다. 몇몇 고고학적 유물 외에는 그들의 종교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모든 신들! 고대의 종교'를 주제로 하는 고전 주간을 맞아, 로마 시대 네덜란드의 신들을 들여다본다. 해답은 로마의 역사 기술 속에 있다.

로마와의 접촉

게르만 민족은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 로마 작가 타키투스(약 56~117년)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신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부여하고 신전 안에 가두는 것은 천상의 존재들에게 정당한 예우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로마 시대 이전의 고고학적 발견물도 이러한 생각과 부합한다. 주로 동물과 사람의 뼈가 출토된 제사 구덩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게르만족은 강의 합류점이나 늪 같은 자연의 특정 장소를 신성하게 여겼던 것으로 추정되며, 물이 그중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장소들에서는 장신구와 무기, 그리고 사람을 바친 흔적이 발견되었다.

여러 로마인들은 로마 국가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머나먼 야만인의 땅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했다. 카이사르 역시 이곳에서 치른 전쟁들을 저술했다. 이런 글들은 편향되어 있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야만인, 즉 게르만족은 당연히 로마인보다 열등한 존재, 문화와 문명이 덜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존재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이 자료들은 여전히 활용 가치가 있다. 상호 접촉 이후 로마적 색채를 띠게 된 게르만 신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메르쿠리우스를 숭배하며, 특정 날에는 인신공양까지 바친다. 헤라클레스와 마르스에게는 적법한 동물을 바쳐 달램을 구한다." 다만 이들이 원래 어떤 게르만 신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받아들여진 신들

로마인들은 숭배자들이 로마의 신들을 존중하고 신앙에 합류하는 한, 이질적인 신들을 자신들의 판테온에 쉽게 추가했다. 그들은 그것이 다른 지역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 본질적으로 같은 신들이라고 확신했다. 타키투스는 이를 '인테르프리타티오 로마나(Interpretatio Romana)', 즉 로마식 해석이라 불렀다. 실제로 로마군 지휘 아래 게르만족이 주둔했던 진영에서 헤라클레스-마구수누스(Hercules-Magusanus)에게 바치는 제단이 발견되었다. 바타비족의 최고신이 로마의 영웅신 헤라클레스와 융합된 것이다.

야만인들이 로마 제국의 일원이 된 후, 중요한 남성 신들은 로마화되었다. 로마 신과 토착 신의 이름을 하나로 합침으로써 로마와의 동맹을 강조하는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여기서 핵심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승인해야 했던 시조 신화였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임을 내세운 바타비족은 그러한 계보 신화가 없는 부족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누렸다. 아울러 군신 헤라클레스 숭배에 함께 참여하는 경험은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바타비족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힘이 되었다.

토착 신들

로마의 종교는 매우 실용적이었다. 예컨대 긴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거나 병에서 회복하기를 원할 때, 소원이 이루어져 준다면 해당 신에게 제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두 우트 데스(do ut des)' — 내가 주니 당신도 주소서. 소원이 이루어지면 기쁜 로마인은 봉헌석(votive stone)을 세웠는데, 이는 빚을 갚았다는 내용이 새겨진 석제 봉헌물이었다. 게르만족도 이 관습을 받아들였고, 네덜란드에서도 이런 제석들이 발견되었다. 토착 신들에게 주로 감사를 전했지만, 그 방식은 로마식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존재는 네할렌니아(Nehalennia)다. 그녀는 아마 제일란트 주 돔부르크 근처에 신전을 두었으나, 3세기에 이미 바다에 잠겨버렸다. 1647년,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봉헌석이 해변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남겨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어망에 네할렌니아에게 바쳐진 제단 조각들이 자주 걸려 올라왔다.

네할렌니아는 다산을 관장하는 게르만 여신이자 선주와 상인의 수호신이었다. 여신들은 주로 개인적인 일에 개입했으며, 대개 지역 단위로 숭배되었다. 토착 이름 앞에 '데아(Dea, 여신)'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반면 로마의 이해관계를 포함해 더 포괄적인 이익을 돌보던 중요한 남성 신들은 사정이 달랐다. 더 큰 집단 역시 이 신들을 숭배했기에, 알아보기 쉽도록 로마식 이름이 붙여졌다.

바타비족의 최고신 헤라클레스-마구수누스가 바로 그런 신이었다. 그에게 바쳐진 무기들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쟁의 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헤라클레스 마구수누스를 기리는 신전의 유적도 발굴되었다. 로마 건축 양식의 신전 흔적은 브라반트의 엠펠(Empel)과 케셀(Kessel), 헬더란트의 엘스트(Elst)에서 발견되었는데, 기단 위에 세워진 기둥과 삼각 지붕을 갖춘 폐쇄형 직사각형 건물이었다. 이 신전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신전 부지 안에 위치했으며, 신의 상은 오직 사제만 출입할 수 있는 신전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다. 밖에는 입구 계단 아래에 제단이 놓였다. 사람들은 이 부지에 모여 제사를 지켜볼 뿐 아니라 교역을 하고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작은 신사는 흔히 목재로 지어졌지만, 중요한 신전은 자연석으로 세워졌다. 이 돌은 해당 지역으로 수입해야 했기에 값이 상당히 비쌌다. 대신 더 저렴한 청동이나 돌로 만든 작은 상들은 가정 제단용으로, 일상적인 가정 신앙을 위한 부적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상들 다수는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와 그의 아내 유노, 딸 미네르바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함께 신성한 트리오, 이른바 카피톨리노 삼신(Trias Capitolina)을 이루었다. 상업의 신 메르쿠리우스, 그리고 전쟁의 신이자 로마의 평화를 지키던 마르스 역시 인기가 높았다.

신전과 신사는 흔히 로마인이 오기 전부터 신성한 의미를 지녔던 장소에 세워졌다. 뢰르 강과 마스 강이 만나는 곳은 이미 여신 루라(Rura)에게 바쳐진 땅이었다. 케셀의 헤라클레스 마구수누스 신전 역시 마스 강과 발 강이 합류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또한 신전은 흔히 마을이나 군영(castra, 예: 니메헌) 근처에 위치했다. 유일한 공식 로마 도시(municipium)였던 현재의 포르부르흐(Voorburg)에서는 작은 유피테르 제단 외에 신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지하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동맹

69~70년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이끈 바타비 반란 동안 여러 목조 신전이 불타 없어졌다. 사태가 다소 가라앉은 후, 로마인들은 새로운 동맹을 확인하기 위해 같은 자리에 더 큰 규모의 석재 신전들을 세웠다. 엘스트의 신전도 이렇게 재건된 신전으로, 지금까지 네덜란드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크다. 가로 31미터, 세로 23미터, 높이 15미터에 달하는 규모로 미루어 보아, 최고신 헤라클레스 마구수누스가 이곳에서 숭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엠펠의 신전은 그를 위한 더 작은 신사였으며, 이곳에서는 신의 조각상과 다량의 봉헌 무기가 출토되었다.

3세기에 로마인들이 투턴족 지역에서 철수하고 기독교가 서서히 자리 잡으면서, 신전들은 황폐해졌다. 귀한 돌들은 교회를 짓는 데 쓰이는 등 다른 용도로 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종교로의 전환을 더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이전에 신사가 서 있던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예컨대 엘스트의 교회는 바로 그 신전 위에 지어졌다. 검증된 로마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