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는 수천만 명에 이릅니다. 영화와 책은 특히 미국 군인들이 감당한 거대한 희생과 손실을 부각해 왔죠.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독일 국방군과의 전투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었을까요?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첫 5개월간의 전투에서 붉은 군대는 전사, 부상, 포로를 모두 합쳐 무려 300만 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아직 1939년부터 이어져 온 세계 대전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계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였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미국은 전쟁 수행의 일부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제2전선을 기다리다
이러한 시간적 차이만 놓고 보더라도, 소련이 전쟁의 모든 부담을 홀로 짊어졌다고 주장하던 스탈린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련의 지도자는 미국과 영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며, 동부 전선의 나치군 압력을 줄이기 위해 유럽에 제2전선을 개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군의 유럽 상륙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소련에게 다소 숨통을 틔워준 것은 1942년 11월 초, 미·영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지역에 주둔한 독일·이탈리아군과의 전투는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42년 11월, 알제 인근 해변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병력.
북아프리카에서의 승리야말로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유럽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1943년 7월, 연합군은 이탈리아에 진입했지만 아펜니노 반도에서의 작전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시절 히틀러와의 싸움은 여전히 크게 스탈린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과연 대중문화가 그려온 '용감한 미국인'이라는 메시지는 승자가 써 내려간 선전에 불과한 걸까요?
D데이, 운명의 상륙작전
확실히 미국 지도부는 자국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연합군의 유럽 대륙 침공이 지연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침공은 1944년 6월 6일에야 시작되었으며, 작전 코드명은 '오버로드(Overlord)'였습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골드', '소드', '주노' 해변은 방어군의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은 영국군과 캐나다군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유타'와 '오마하' 해변은 미국군의 몫이었습니다. 유타 해변에서는 교전이 있었지만 상륙 자체는 큰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병사들은 독일군의 결사적인 방어에 직면했습니다. 무려 3만 5,000명의 병사가 깊이 1.5km에 불과한 교두보에 갇혔고, 손실도 막대했습니다. 800명이 넘는 인원이 전사했습니다.
다행히 참극은 제101공수사단 E중대의 낙하산 부대 덕분에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몇몇 병사들은 브레쿠르 저택 근처에 은폐된 적의 포병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작전을 이끌었던 딕 윈터스는 『형제들 그 너머』에서 회상하기를, 수년이 지난 후에도 구출된 병사들의 가족들로부터 감사를 받곤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생명이 구원되었고, 미국의 예상 손실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오버로드 작전의 결산은 전반적으로 호평할 만합니다. 역사학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공격 시점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합니다. 1944년 6월, 독일 국방군은 이미 동부 전선에서 출혈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전투도 진행 중이었고, 제3제국의 자원은 체계적으로 고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만약 연합군이 더 일찍 공격했다면 손실은 비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유리한' 시기에도 6월 28일까지 병력의 47%를 잃은 E중대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약 60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전투 지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상을 입었습니다.
위험한 존재는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상륙 작전 성공만으로 적을 완전히 격파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영 군대는 여전히 1944년 12월 16일 개시된 독일 국방군의 마지막 대공세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승리의 대가는 매우 컸습니다.

1944년 12월, 아르덴 지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안트베르펜을 점령함으로써 아이젠하워의 군대가 동진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아르덴에서 벌어진 그들의 타격은 미국군에게 극도로 불리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완전한 작전 능력을 갖춘 미군 부대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9월에 실패한 마켓 가든 작전 이후 회복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전에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때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었습니다.
제101공수사단 역시 12월에 손실 보충 중이었습니다. '이지 중대(Easy Company)'만 해도 한 달 중반 기준 가용 병력은 67%에 불과했습니다. 인근 보병 부대의 형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944년 6월 침공에 참여했던 베테랑 부대들의 손실은 무려 80%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약화된 부대들은 히틀러가 겨울 공세를 위해 결집시킨 25개 사단과 맞서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은 완전히 기습당했습니다. 독일군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죠. 게다가 악천후로 항공기를 운용할 수 없어 정찰은커녕 자군에 대한 항공 지원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윈터스는 『형제들 그 너머』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전선에서의 삶은 끔찍했습니다. 1944년에서 194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30년 만에 가장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날씨가 개선되어 보급품 투하가 가능해지기 전까지, 병사들은 진지를 사수하는 데 필요한 장비, 동복, 탄약이 절실히 부족했습니다.

미군은 아르덴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전쟁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병사들은 전투 중에만 죽지 않았습니다. 손실의 무려 3분의 1이 질병, '참호족(trench foot)', 동상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아르덴 전투와 독일군 공세 저지는 연합군에게 7만 5,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안겼습니다.
승자로서의 미국
미국의 손실을 계산할 때 기억해야 할 점은, 비교적 늦게 참전했음에도 미군이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에서 입은 손실 외에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손실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결국 전쟁 전 기간, 히틀러가 자살할 때까지 이 지역들에서 나치 독일과의 전투로 인한 미국의 총 손실은 무려 75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 중 17만 7,000명이 전사자입니다.
소련의 손실과 비교하면 크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실의 규모는 전술, 최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의 장비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유럽 전선에 관한 한 시간 역시 미국 편에 작용했습니다. 그들은 제2전선을 개설할 시점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예외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17만 명의 미군이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57만 3,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물론 이 말이 개별 부대가 궤멸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종전까지 E중대의 누적 손실은 무려 150%에 달했습니다. 소규모 부대 기준으로 이는 48명의 전사자와 100명의 부상자를 의미합니다. 놀라운 수치는 일부 병사가 두 번 이상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입니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태평양에서 수십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는 것은 정말 필요했을까요? 확실히 그것은 히틀러에 대한 승리를 앞당겼습니다. 아울러 서쪽으로 진격해 오던 미래의 적, 소련의 발걸음도 늦추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결국 전쟁 참전의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고 믿을 또 하나의 근거가 있습니다. 역사학자 폴 케네디에 따르면, 전쟁은 1940년부터 1944년 사이 미국의 산업 생산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성장시켰습니다. 성장률은 연간 무려 15%에 달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미국은 유일하게, 그리고 그 어느 나라보다 훨씬 부유해졌습니다. 종전 후 미국의 금 보유량은 세계 전체의 4분의 3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인은 실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였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