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네덜란드 '기아의 겨울',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을까?

1944년에서 1945년으로 이어지던 겨울, 네덜란드 서부 도시들은 식량·연료·의복의 극심한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잉그리드 드 즈바르테(Ingrid de Zwarte)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시민들은 스스로 조직화해 약자를 돌보았고, 그 결과 기아의 겨울(Hunger Winter) 동안 도시 아동의 사망률은 모든 연령층 가운데 가장 낮았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연합군의 진격과 철도 파업

1944년 가을 연합군의 진격은 예상만큼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런던의 네덜란드 망명정부는 마켓 가든 작전 기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9월 17일 전국 철도 파업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점령군은 아른험에서 연합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그해 가을이 끝나기 전까지 해방된 곳은 네덜란드 남부뿐이었습니다.

이어진 겨울은 혹독했고, 서부 도시들은 심각한 부족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문제는 음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동부와 북부 농업 지역에서 식량을 실어 나를 연료와 운송 수단이 끊겼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책임은 독일에 돌려졌습니다. 보복으로 식량을 억류하고 점령 말기 네덜란드 인구를 고의적으로 굶겨 죽였다는 통설이 그것입니다.

파업 지속의 배후에는 연합군이 있었다

NIOD 전쟁·홀로코스트·집단살해 연구소와 옥스퍼드 대학교 소속인 드 즈바르테는 저서 『기아의 겨울(The Hunger Winter)』에서 이 통설이 전부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기근과 사회 불안은 점령 세력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라이히스코미사리어 자이스잉콰르트는 3주 만에 해상 수송 금지를 부분적으로, 6주 만에 완전히 해제해 감자 수확물이 썩기 전에 북동부에서 란트스타트로 운송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라디오 오라녜(Radio Oranje)를 통해 철도 파업을 계속하라는 호소의 배후에는 연합군이 있었다고 그녀는 밝힙니다. 점령지 전투를 위해 아펠도른 동쪽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1944년 10월 초 독일의 보복 가능성이 너무 크다며 전국에 파업 지속을 요청했고, 이 파업은 1945년 5월 해방 때까지 이어지며 기아의 겨울 내내 식량 열차의 서부 행을 막았습니다.

서로를 도운 시민들

파업한 열차 외에도 트럭과 배에 쓸 연료가 부족했고, 잇따른 폭격 탓에 육상·해상 이동 자체가 위험했습니다. 구호소의 큰 냄비를 핥던 야윈 아이들의 사진은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럼에도 도시 아동들의 처지는 훨씬 더 나빴을 수 있었다고 드 즈바르테는 발견했습니다. 최근 공개된 기아의 겨울 희생자 통계에 따르면, 점령 도시에서 굶어 죽은 학령기 아동의 비율은 농촌 지역보다 높지 않았고 란트스타트 광역권 밖 일부 지역보다 오히려 낮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정부의 배급만으로는 생존에 부족했습니다. 부유층은 바가지요금을 치르며 암시장에서 식량을 샀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굶주림 여행'을 떠나 시골 농가에서 식량을 사거나 마지막 남은 소지품과 물물교환을 했습니다. 그러나 드 즈바르테는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식량을 확보하려 한 활동까지 조명한 최초의 연구자입니다. 그녀는 알려지지 않은 지역 기록 보관소와 교회 회의록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시민 단체들이 줄어든 정부 배급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웃, 지역 상점, 지역 교회의 소규모 활동에서 출발해 대규모 구호 단체로 성장했고, 그 효과가 워낙 커서 도시 아이들이 겨울을 비교적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점령 당국의 묵인과 협력

지역 활동들이 통합되면서 추진력은 급격히 커졌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로마 가톨릭 구호 단체가 개신교 및 비종교 위원회와 합병했고, 협력한 교회들은 전국 단체인 '종교 간 비상 식량 공급 기구(IKB)'를 결성했습니다. IKB는 네덜란드와 독일 당국 양쪽으로부터 굶주린 국민을 위한 식량 수집과 영양실조 아동의 시골 소개를 허가받았습니다. 이런 활동이 아동에 집중된 것은 아이들이 국가의 미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동이 구호 활동의 핵심 대상이었습니다. 네덜란드가 특별했던 점은 협력 체계가 형성된 방식과 독일 점령당국과의 공조입니다. 그리스에서는 영양실조 아동의 다른 지역 요양이 독일에 의해 금지됐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자이스잉콰르트가 이를 승인했습니다. 아동 이동이 전쟁 수행에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임시 요양을 받은 영양실조 도시 아동, 이른바 '창백한 코들'의 이야기에서 이 협력의 측면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기존 통설은 구호 단체들이 반대하는 점령자에 맞서 목표를 이루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동 체력 증진을 내세웠던 나치 조직들은 협력한 교회들보다 훨씬 덜 성공적이었습니다. 위탁 가정은 나치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교회는 신뢰했고, 점령당국도 민간 구호 단체를 방해하는 데 별로 힘쓰지 않았습니다."

교회 네트워크는 광범위했습니다. 많은 농부들이 나치 산하 수집 활동을 불신해 암시장에 물건을 파는 쪽을 택했지만, 교회의 호소에는 응해 란트스타트의 굶주린 이웃에게 식량을 기증했습니다. 영양가 높은 지역에 거래선이 있는 기업들도 직원들을 위한 물품을 마련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더 많이 희생된 남성과 고립된 이들

이런 보충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의 도시 주민이 굶어 죽었으며, 특히 70세 이상 남성의 희생이 컸습니다. 종전 직후 보고서들은 노인, 최빈층, 보호시설 수용자들이 기근기에 가장 큰 고통을 겪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집단에서 사망이 집중된 이유는 공식 배급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양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미망남이나 하숙객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고령 남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KB는 영양실조 정도에 따라 추가 식량 지급량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구호망이 모든 이에게 닿지는 못했습니다. 지역 의사가 환자를 잘 파악해 영양실조를 확인하고 IKB로 연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회적 접촉이 없는 고독한 사람들의 경우 이 과정이 종종 빗나갔습니다.

사회적 결속이 만든 차이

기아의 겨울에는 4세 이상 전원이 같은 배급을 받았지만,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칼로리가 필요합니다. "점령 초기에는 노동 강도를 반영해 강도 높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더 지급했고, 그런 일은 남성이 더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배급이 삭감되면서 노동자 계급 동네에서는 부유한 동네보다 희생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배급을 보충할 재정적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드 즈바르테는 동네 단위 활동과 노동자 계급 동네의 높은 연대가 없었다면 이 사망률 격차는 훨씬 컸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동자 계급 동네 주민들은 더 자주 자발적으로 조직했고, 사회적 결속이 강해 도움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았습니다. 덕분에 소외되는 이가 줄었습니다."

"굶주림이 사람을 자기 피부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로 만든다"는 통념은 기아의 겨울에 관해서는 너무 단편적이라는 것이 그녀의 결론입니다. "물론 농부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요구하는 등의 폐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굶주린 네덜란드인들은 스스로 조직함으로써 서로를 도왔습니다."

결국 시민·기업·교회의 자발적 활동은 란트스타트 사망률, 특히 아동 사망률 감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드 즈바르테의 연구는 네덜란드 서부의 기아의 겨울을 새롭게 그려냅니다. 그것은 사회가 해체된 시기가 아니었고, 독일 점령당국이 8개월간 네덜란드인을 고의적으로 굶겨 죽인 시기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역사 서술과 집단 기억 속에서 굳어진 이 국가적 서사는 너무 일편적이었다는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