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알베르 마티에즈가 본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테러와 몰락의 진실

알베르 마티에즈가 본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테러와 몰락의 진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과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브뤼셀 연구단 폴노르 그룹(Pole-Nord Group Brussels)의 번역가이자 협력자인 스테파니아 디 파스콸레(Stefania Di Pasquale)가 보내준 글을 Pills of History에 소개한다. 이 글은 프랑스 혁명사의 거장 알베르 마티에즈(Albert Mathiez)가 바라본 테러(恐怖政治)와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에 대한 해석이다. 폴노르 그룹의 연구 성과는 https://www.marat-jean-paul.org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 학자가 제시한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본다. 그러나 마티에즈의 해석은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의 견해로서, 아직도 밝혀져야 할 것이 많은 혁명의 가장 극적이고 논쟁적인 순간에 새로운 빛을 비추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알베르 마티에즈가 본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테러와 몰락의 진실

테르미도르 9일의 국민공회 회의: 탈리앙이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다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즈의 설명

혁명 프랑스가 국경에서는 유럽 군주국들의 공격을 받고, 내부에서는 적과 타협하려는 세력과의 투쟁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절, 공공안전위원회는 승리하거나 멸망하거나의 기로에 서 있음을 깨닫고 모든 역량을 극한까지 집중해야 했다.

온화하고 인간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배신자들에게 공포를 심어 무력화시키기 위한 억압 체계의 실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평화’가 지배하던 제헌의회 시절, 성급한 예외 조치에 반대하는 최초의 법률에 반대했던 사람, 성직자와 망명 귀족에 대한 최초의 법률에 반대했던 사람, 모든 권리와 자유를 감히 옹호했던 사람, 사형제 폐지를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주의적 출발점에 서 있던 그는, 사방에서 위기에 몰린 공화국을 구원하기 위해 점차 자신의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1793년 프랑스는 파벌 간의 대립으로 찢겨 있었다. 내전이 외부의 전쟁에 더해졌고, 강대한 정당인 지롱드파는 적의 승리를 위해 공개적으로 움직였으며, 배신자 뒤무리에(Dumouriez) 장군과 손잡고 연방주의 프랑스를 세우려 하고 그곳에서 군대를 모병하기까지 했다.

프로이센군의 샹파뉴 침공이라는 위기 속에서 배신적인 군주제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1792년 8월 10일 봉기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에 반한 죄를 심판할 최초의 특별법정 설립을 주도했다.

왕당파와 결탁한 지롱드파는 각 주(department)를 선동해 봉기시켰고, 항구 도시 툴롱(Toulon)을 영국군에 넘겨주었다. 이에 로베스피에르, 쿠통, 콜로 데르부아, 비요바렌, 단통 등 몽타냐르파 의원들은 책임자들의 체포를 요구했다.

1793년 5월 31일 지롱드파 의원들이 체포되었고, 혁명법정의 재판을 거쳐 같은 해 10월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93년 말까지도 툴롱은 여전히 영국의 수중에 있었다. 공공안전위원회는 혁명 조치의 갑작스러운 중단과 용의자들의 대량 석방이 폭력적인 반동을 촉발해 공화국 전체를 집어삼킬 것을 우려했다.

여기에 단통파의 경솔함과 정치적 조종, 조기 강화를 노린 음흉한 음모, 부패한 인물들은 물론 노골적인 왕당파들과의 수상한 유착까지 더해져 이러한 경솔함은 더욱 부추겨졌다.

위원회는 국민의 활력을 마비시킬 때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우익 극단주의자들과 좌익 극단주의자들을 모두 결연하게 상대했다.

로베스피에는 공공안전위원회 일부 위원들의 심각한 만행, 즉 낭트에서 캐리어(Carrier)가 자행한 학살, 보르도에서 탈리앙(Tallien)의 폭거, 프랑스 남부에서 바라스(Barras)와 프레롱(Fréron)이 저지른 약탈과 학살, 그리고 리옹에서 푸셰(Fouché)가 벌인 만행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을 모두 파리로 소환하고 활동을 차단하려 했다. 혁명의 권력을 남용한 불순한 자들의 손에서 그것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파리로 소환된 이 모든 ‘프로콘술(proconsul)’들은 원한에 가득 찬 마음으로 돌아왔고, 함께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Saint-Just), 쿠통, 르바,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뒤마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사실 로베스피에는 온정과 관용을 추구하고 있었다. 민중의 종교적 편견에 대한 그의 배려, 신앙심 있는 시민들을 공화국과 화해시키기 위한 최고존재 축제와 프레리알 20일(1794년 6월 8일)의 법령은, 그가 점진적으로 예외 조치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완전한 평온을 회복하려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는 독재자, 곧 자신의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종의 교황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테르미도르파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소위 독재라 불리는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는 공공안전위원회 내에서 소수파였다.

혁명재판소를 통제하던 일반안전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은 테러를 종식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작품이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것은 테러를 남용하고 그것을 무한히 이어가려 했던 사람들, 곧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한 방편으로 그것을 동원했던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무심코 촉발한 반동을 막지 못한 채 사건의 물결에 휩쓸렸고, 전술적 이유로 과잉 행위를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쿠통과 동일시하면서, 이들이 곧 테러의 화신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알베르 마티에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