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는 로마 제국의 몰락에 한몫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대기 오염과 삼림 벌채를 일으켰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여파는 현대만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는 세상의 종말이 곧 다가온다고 믿었습니다. 한때 만국의 수도로 군림하던 로마에서 삶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도시는 홍수에 휩쓸렸고, 기근이 들었으며, 역병이 창궐했습니다. 과거의 이러한 참화들이 기후 변화의 결과물이라는 고고학적 증거가 갈수록 축적되고 있습니다.
로마의 대기 오염
1990년대 연구자들은 그린란드 얼음 깊은 곳에서 납과 구리 입자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서기 전환기 무렵 스페인을 비롯한 지중해 일역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채굴 활동의 산물이었습니다. 채굴 과정에서 배출된 막대한 미세 입자물질은 성층권까지 올라간 뒤 그린란드로 실려 가서 눈비로 쏟아졌고, 얼음과 눈에 덮인 채 2000년 동안 보존되었다가 드릴 코어를 통해 지표로 끌어올려졌던 것입니다.
로마의 대규모 채굴은 1세기부터 온실가스인 메탄의 배출량도 걷잡을 수 없이 늘렸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측정됩니다. 이렇게 확인된 로마 제국 전성기의 대기 오염 수준은 18~19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 다시 넘어서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광범위한 삼림 벌채까지 더하면, 당시에는 아직 근대적인 환경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후와 인간 행동의 관계
당시 어떤 로마인도 인간이 환경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남길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로마 경제 자체가 장기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낳을 만큼 충분히 오염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는 이제 로마 제국을 연구하는 고대사 학자들에게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농업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새로운 연구들은 로마 제국이 기후·인간 행동·역사의 흐름 사이의 관계를 검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시험대가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로마 제국이 여러 기후대와 수많은 미세 기후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였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는 로마 시대 요르단에 습윤기가 시작될 때 로마 시대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는 건조해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편차는 로마의 기후사 복원을 더욱 흥미롭게 하면서도 동시에 더 어렵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역사 기후 연구는 하나의 통일된 그림을 얻기 위해 상이한 데이터들을 결합해야 합니다. 알프스 빙하, 나무 나이테, 석순, 점토층, 사해 지역의 퇴적물부터 태양 활동, 대서양과 인도양의 대규모 기상 시스템 분석까지… 이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걸러내고, 서로 교차 검증해야 하는 진정한 노력의 작업입니다.
후기 고대 소빙하기
고대에 대한 역사적으로 유용한 첫 기후 연구는 그래서 2012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여러 새로운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로마 기후 연구는 역동적인 학문 분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은 무엇일까요? 요약하면 세 개의 주요 기후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150년까지는 이른바 '로마 기후 최적기'로, 비교적 따뜻하고 습윤하며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150년부터 450년까지는 이 안정이 깨지며 평균적으로 다소 추워지고 건조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후기 고대에서 초기 중세로 넘어가는 450년부터 700년까지는 악화 추세가 이어져 '후기 고대 소빙하기'라고 부르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이 비교적 한랭한 시기의 형성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가장 확실히 확인되는 것은 530년경(정체는 미상) 화산의 대폭발입니다. 화산이 하늘로 쏟아낸 물질이 워낙 많았던 탓에 당대 사람들은 그 해를 '태양이 빛나지 않았던 해'라고 불렀습니다.
536~545년은 후기 고대 소빙하기 중 가장 추운 시기로 기록됩니다. 올리브나무, 곡밭, 포도밭, 과수원이 흉작을 거듭하면서 전체 인구의 식량 공급이 크게 위협받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후기 고대 소빙하기는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병든 기후 속의 위기
이렇듯 흥미로운 새 통찰들은 더 큰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 놓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앞서 살펴본 시기들이 가장 흥미로운 이유는, 유서 깊은 고대 문헌과 비문을 통해 오랫동안 알려져 온 로마사의 거대한 정치적 변곡점들과 대체로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기후 최적기는 후기 공화정부터 제정 전성기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최대 팽창과 번영과 겹칩니다. 기후는 150년경부터 악화되기 시작했고, 바로 그 무렵부터 정치적 위기와 국력 약화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안토니누스 역병의 첫 기록도 이 시기에 등장합니다. 이 천연두 유행병은 165년경 시작되어 수십 년간 제국을 집어삼켰습니다.
3세기에는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제국은 국경 밖의 침입과 화폐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황제는 더 이상 로마 원로원 계급에서 자연스럽게 배출되지 않고 군대에서 나왔습니다. 이른바 '군인 황제'들은 서로의 목숨을 앞당겼고, 자연사한 이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정치적 분열이 이 시기를 규정했고, 제국은 여러 하위 영역으로 분열되어 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기 이미 험난했던 정세를 병든 기후가 한층 더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유럽 최초의 기후 난민
4세기에는 정치적 회복이 이루어졌고 기후도 일부 지역에서는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부정적 추세가 계속되어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해졌고, 곡물 재배나 올리브 재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로마 제국 전체의 가용 농경지 면적 순감소로 이어졌습니다.
나일강의 범람도 불규칙해졌습니다.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곡창이었기에 그 파장은 멀리 로마까지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나일 유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생계를 이어가지 못한 농부들이 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는 하강 나선을 만들었고, 로마 시대를 특징짓던 인상적인 도시화마저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곡창인 북아프리카에서는 강우가 줄고 사막이 번져 나갔습니다. 후기 고대를 일반적 쇠퇴와 정치적·사회경제적 붕괴의 시대로 기억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같은 시기 유라시아 초원에서도 눈에 띄게 건조해졌습니다. 이곳에 살던 훈족의 삶은 어렵고 심지어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그들은 서유럽으로 이동하며 고트족 같은 다른 집단들을 앞세워 밀어냈습니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거친 말, 비대칭 활, 신속한 기병을 무기로 처음에는 무적이었던 훈족은 단순히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과 공포를 퍼뜨린 무법자들의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훈족을 유럽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기후 난민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5도면 이미 재앙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기후와 역사적 사건 사이의 상관관계에 인과관계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당분간 답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단순한 연결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통찰과 추정, 가설은 데이터 자체의 신뢰성과 해석은 물론,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 관한 수많은 후속 질문을 낳습니다.
그럼에도 과거 기후에 관한 이 모든 새로운 지식은 이제부터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흥미로운 새 차원, 즉 변수를 제공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특히 시사적인 것은,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불러오는 데 필요한 기후 변화가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세계의 데이터에 따르면, 단 2.5도의 차이만으로도 한 사회는 완전히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저술과 『대화록(Dialogues)』에서 5세기 말의 참상과 그 파국적인 결과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약 100만 명을 부양하던 로마는 이제 겨우 1만~2만 명의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후를 소중히 다루고,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치닫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