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미국 외교정책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조지 F. 케넌(George F. Kennan)이다. 외교관이자 역사가, 지정학 전략가였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미국의 반공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케넌의 통찰은 공격적인 군비 경쟁이라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활용되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고독과 오해 속에 살았다.
1946년 2월 22일, '장문 전보'의 탄생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과 군비 경쟁이 수십 년간 이어진 냉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특정짓는다면, 1946년 2월 22일이 가장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그날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의 실무 책임자였던 조지 케넌은 병상에서 워싱턴의 국무부로 긴 전보를 구술한다.
거의 8,000 단어에 달하는, 전보치고는 비정상적으로 긴 분량이었다. 케넌은 워싱턴에서 수없이 반복되던 물음—"왜 러시아인들은 저렇게 행동하는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다소 짜증이 섞인 답변을 담아냈다.
케넌은 1931년부터 국무부에서 러시아 및 동유럽 관련 직책을 두루 거쳤다. 베를린에서 정치학과 러시아의 역사·문화를 공부했으며, 소련 연구 분야에서 미국 최초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 외교관 엘리트 집단과는 사뭇 다른 견해를 지닌 전문가였다.
사막에서 우는 소리
새 대통령 해리 트루먼을 둘러싼 외교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처럼 스탈린과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수많은 외교관들이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스탈린이 점령한 동유럽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케넌은 일찍부터 이것이 헛수고임을 정확히 간파했다. 스탈린에게는 전혀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넌은 트루먼 집권 초기부터 유럽의 분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선견지명 있는 시각을 지녔음에도, 케넌은 모스크바에서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마치 사막에서 우는 목소리처럼 고독을 느꼈다. 1946년 2월, 워싱턴에서 "소련은 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설립에 협조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도착했을 때, 그는 동료 외교관들의 순진함에 짜증을 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는 러시아 정책의 본질을 다시 한번 설명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장문 전보(Long Telegram)'에서 케넌은 소련과의 전후 관계 구축이 왜 불가능한지 상세히 기술했다. "러시아 정책은 외부 세계에 대한 객관적 분석에 근거하지 않는다.(...) 크렘린의 신경증적 세계관은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정책은 계산적이며, 권력과 영향력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해 이 불안감을 상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스탈린에게 적대적인 외부 세계는 국내 독재를 정당화하는 필수 요소였다.
'악성 기생충'
크렘린이 편집증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협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케넌은 동시에 소련 체제가 내부적으로 취약하여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때까지 미국은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해야 한다. "공산주의란 썩은 고기만을 먹는 악성 기생충"이기에, 미국은 서방의 민주적 제도가 건강하게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서방의 강한 저항만이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봉쇄(containment)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보는 명료하고 강렬한 어조로 작성되었다. 게다가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였다. 고위 관료와 장관들이 이를 읽었고, 소문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의 책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는 케넌이 평생 추구해 온 것, 즉 인정과 고독의 종식을 가져다주었다. 케넌은 모스크바에서 소환되어 권위 있는 국립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에서 강연 시리즈를 진행했고, 국무부의 공식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트루먼 독트린
케넌의 장문 전보는 트루먼이 같은 해 3월 12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토대가 되었다. 트루먼은 공산 게릴라가 내전을 일으킨 그리스와 터키(터키의 경우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에 대해 미국이 경제적·군사적 원조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약속을 '자유세계' 전체로 확장했다.
"무장 소수세력이나 외부 압력에 의한 예속 시도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민족을 지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원조는 경제 안정과 균형 잡힌 정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경제·재정 지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훗날 '트루먼 독트린', 혹은 '봉쇄 독트린(Containment Doctrine)'으로 알려지게 된다.
케넌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46년 12월, 당시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참모진이 작성한 공산주의 관련 보고서에 대한 의견을 케넌에게 구했다. 한 달 후 케넌은 상세한 코멘터리를 작성했고, 포레스탈은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독립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강연 자리에 추천했다.
외교협회의 영향력 있는 기관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의 편집장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Hamilton Fish Armstrong)은 케넌에게 더 넓은 독자층을 위해 글을 발표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X'라는 이름의 기고
케넌의 글 소련 행동의 근원(The Sources of Soviet Conduct)은 1947년 6월에 게재되었다. 국무부 재직 중이었기에 케넌은 'X'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곧바로 그의 신원을 폭로하면서, 이 글은 사실상의 정부 문서로 여겨지게 되었다.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케넌은 더 이상 러시아 정책을 '전통적 불안감'에서만 설명하지 않고, 공산주의 이념 자체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 그에 따르면 이념은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적이며 자본주의 타도를 지향한다.
미국은 이를 "봉쇄"해야 하며, 소련이 자유세계의 이익을 위협할 때마다 "대응"해야 한다고 케넌은 반복해서 강조했다. 단순히 방어하며 기다리는 수동적 방식이 아니라, 소련 진영 내부를 교란하는 능동적 방식까지 포함해서였다. 이는 1947년 중앙정보국(CIA) 설립의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케넌의 장문 전보, 그로 파생된 봉쇄 독트린, 그리고 'X' 논문은 함께 1970년대까지 이어진 상당히 공격적인 미국의 냉전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케넌의 언어가 때로 매우 공격적으로 들렸음에도, 그는 결코 미국이 군사적 수단으로 소련을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지향한 것은 서방 세계를 경제적·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함으로써 공산주의가 발붙일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서유럽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였던 마셜 플랜—케넌 역시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은 그의 구상대로 실행된 대표적인 사례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군비 경쟁
그러나 1949년 딘 애치슨(Dean Acheson)이 마셜의 후임으로 국무장관에 취임하면서 케넌의 영향력도 시들해졌다. 애치슨은 전형적인 강경파였으며, 소련 '봉쇄'를 단순한 정치적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베를린 봉쇄, 중국의 공산 혁명, 소련의 첫 핵실험이 그의 시각을 더욱 굳건히 만들었다.
애치슨이 작성한 정책 문서에는 심지어 스탈린이 세계 정복을 위한 비밀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케넌의 귀에는 황당한 소리로 들렸다. 결국 트루먼 행정부는 우호국가에 무기를 공급하고 핵무기 비축량을 늘리며 무장 반공 저항 단체를 지원하는 '적극적 봉쇄'와 억지(deterrence) 정책으로 전환했다.
케넌은 평생 동안 봉쇄 독트린의 직접적인 결과물인 군사적 군비 경쟁에 반대했다. 그래서 1970년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소련과의 긴장 완화와 대화를 추구했을 때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여러 미국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은 케넌은 노년까지 국제정치를 예리하게 지켜봤으며, 2005년 프린스턴에서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