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이면에 숨은 물류 체계에 대한 기록은 역사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로스 판 오스턴(Roos van Oosten)은 우리의 배설물 뒤에 숨은 폐기물 문제—대변은 대체 어디로 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고, 현대 변기의 전신인 '오물통(cesspool)'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집필했다.
중세 도시는 정말 악취의 도시였을까?
중세 도시를 떠올릴 때 사람들은 흔히 쓰레기가 가득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좁은 골목, 그리고 그보다 더 지저분한 운하를 상상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사실일까?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도시 평의회가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오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맥주 양조의 기본 원료로 쓰이던 깨끗한 물을 지키기 위해, 도시들은 운하 물에 폐기물과 배설물을 버리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그 대안이 바로 오물통(당시에는 '베어(beer)', 즉 '똥'을 뜻하는 말로 불렸다)이었다. 대부분의 도시 주민들은 임대 주거에 살았고,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위해 지하실이나 정원에 오물통을 파 놓을 의무가 있었다. 부유한 시민들은 자신만의 우물을 가졌지만, 형편이 덜 한 사람들은 하나의 우물을 여럿이 나눠 써야 했다.
보물 찾기처럼 발굴되는 오물통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오물통 규정의 흔적을 정기적으로 발굴해낸다. 그들이 파내는 것은 벽돌로 만든 땅속 구조물로, 여기에 똥 양동이를 비울 수 있었다. 위에 구멍이 뚫린 선반—마치 변기 좌석처럼—을 얹어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형태의 오물통도 있었다. 미터 깊이의 구멍 위에는 악취를 막고, 취한 상태의 사용자가 오물통 안으로 빠지는 사고를 막기 위한 벽돌 돔이 덮여 있었다. 일단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었고, 그 결과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분뇨 속에서 익사하는 것이었다.
로스 판 오스턴이 논문에서 다룬 회수된 오물통은 1,000개가 넘으며, 13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유물이다. "오물통은 사용자들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합니다. 남겨진 씨앗, 과실 핵, 동물 뼈를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의 식단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물통에는 각종 버려진 생활용품이 함께 묻혀 있어, 사용자가 부자였는지 가난했는지를 가늠할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오물통을 훼손되지 않은 정보의 원천, 즉 '폐쇄적 출토 유구(closed find complex)'로 봅니다. 하지만 이는 오물통이 가끔씩 비워져야 한다는 사실과 모순됩니다." 판 오스턴은 역사학과 고고학이라는 두 학문을 결합해 오물통과 그 주변의 물류 체계를 연구하기로 했다.
부족한 기록 자료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오물통을 발굴해냈지만, 문자 기록은 그렇게 후하지 않다. 여기저기 입법 및 검사 규정 속에서 오물통 관련 조항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판 오스턴은 이러한 검사 기록과 이후의 시의회 보고서를 통해 일곱 개 도시의 사례를 살폈다. 해안 쪽 네 도시(하를럼, 라이덴, 도르드레흐트, 알크마르)와 내륙의 세 도시(덴보스, 데번터, 아메르스포르트)였다. 그 결과 그녀는 각 도시 평의회가 저마다 고유한 오물통 정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안과 내륙 간에도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도시가 클수록 규정에 오물통 조항이 일찍 등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경제적 요인도 큰 몫을 했는데, 이는 특히 네덜란드의 황금기에서 두드러졌다. 당시 호랑주(Holland)에서 번영이 가장 크게 증가하면서 도시들이 성장했고, 주민이 늘면 똥도 많아졌다. 그런데도 번영을 누리던 하를럼과 라이덴은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처리했다. 판 오스턴은 말한다. "수 세기에 걸친 인구 증가와 도시 내 오물통 수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두 수치가 비례하여 늘어날 것이라 예상되는데, 실제로 하를럼에서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라이덴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판 오스턴의 설명은 라이덴이 겪은 비정상적으로 강한 성장 때문이었다. 도시의 모든 평방미터를 활용해야 했던 것이다. 1463년 오물통 설치를 의무화했던 이 도시는 1583년부터는 관련 법령이 사라진다(아래 그래프에서 뚜렷한 감소로 나타난다). 그 결과 낡은 '비밀 도랑(secreetgoot)'이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도랑을 통해 분뇨가 운하로 곧바로 흘러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시의회는 악취가 심해지는 것을 묵인했다. 더 많은 주민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번성하는 섬유 산업에 종사할 노동력이 늘어나 더 큰 번영으로 이어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얻은 추가 수입으로 운하를 훨씬 자주 준설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라이덴에게, 여행 기록과 소책자에서 이 도시는 악취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판 오스턴: "도시 방문객들은 라이덴의 운하가 네덜란드에서 가장 더럽다고 적었습니다. 라이덴의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아남지 못했다고 하죠. 그리고 비밀 도랑을 묵인한 탓에 이 지저분한 상황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건설업도 오물통 폐지의 또 다른 동력이었다. 판 오스턴: "집주인들은 흔히 임대 주택을 직접 지었고, 오물통을 비우는 비용도 그들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그 비용은 대략 한 달에서 석 달 치 임대료에 해당했습니다. 당연히 벗어나고 싶어 했을 겁니다. 게다가 비워둔 땅 위에 건물을 지어 다시 임대할 수도 있었고요. 주택 수요가 폭증한 급성장 도시들은 이런 상황을 묵인했습니다."
악취의 직업, '똥의 군주들'
평균적인 오물통은 약 5년이면 가득 차서 비워야 했다. 이것은 '비밀 청소부', 일명 '똥의 군주(lords of the bear)'라 불린 특별한 직업군의 일이었다. 그들은 교대 근무로 일했는데, '구덩이 내려가는 사람'이 밧줄을 타고 구멍 속으로 내려갔다. 이후 운반꾼들이 둘씩 짝을 이루어 분뇨 통을 근처의 짐배까지 끌고 갔다.
물가에서 멀리 살수록 추가 운반꾼을 동원해 제때 오물통을 비워야 했기에 더 많은 돈을 내야 했다. 청소 작업은 엄청난 악취 때문에 밤에만 이루어졌으며, 새벽이 오기 전에 마쳐야 했다. 유쾌한 직업은 아니었겠지만, 오물통 청소는 돈이 잘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17세기 하를럼 시의회는 요금을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하를럼에서는 오물통 수가 계속 늘었지만, 인구 증가와 비례하지는 않았다. 오물통이 없는 새 집이나 방의 세입자들은 자신의 배설물 처리에 책임을 져야 했다. 합법적인 방법은 집에서 양동이나 통을 변기로 쓰고, 그것을 스스로 비밀 청소부의 짐배까지 옮기는 것이었다. 수거 서비스도 가능했지만 비용이 두 배였다. 운하에 불법 투기를 하는 것도 선택지였으나, 비밀 청소부에게 들키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수입원이 물속으로 사라진 것을 본 비밀 청소부에게는 그 벌금이 일종의 용돈이 된 셈이다.
새로운 생각의 등장
18세기는 경제와 인구가 쇠퇴한 세기였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 무렵 오물통의 수도 급감했다. 라이덴 외에도 점점 더 많은 도시가 비밀 도랑을 묵인하기 시작했다. 주민이 줄어 오염도 덜했고, 많은 사람이 오물통 청소의 높은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공장들이 오래된 도심에 문을 열었다. 가정이 운하에 버리는 분뇨와 폐기물은 이 공장들이 내뿜는 오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처음에는, 새 공장이 가져다주는 일자리 때문에 용인되었다.
이 지저분한 흐름 속에서 반가운 예외가 바로 덴보스였다. 이곳에서는 오물통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인근 마을 오르텐(Orthen)의 농부들이 분뇨를 거두어 밭에 거름으로 뿌렸던 것이다. 덴보스 주변의 척박한 사질 토양은 인분 거름을 아주 잘 활용할 수 있었다. 판 오스턴: "아마 이 시스템이 비용을 꽤 줄여줬을 겁니다. 당시 시의회 기록에 따르면 똥 농부들은 19세기 말까지 오물통을 비웠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 화학 비료의 부상이 인분을 시장에서 밀어냈다. 수요가 사라지자 도시는 다시 폐기물 문제에 직면했다.
19세기는 또한 새로운 사상이 꽃핀 세기였다. 도시 정부와 엘리트층은 폐기물 문제는 물론,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생활 조건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시의 위생 불량은 콜레라 같은 전염병을 자주 일으켰다. 피해자 대부분이 과밀한 빈민가에 집중되긴 했지만, 도시 당국에 문제 해결의 경종이 된 것은 분명했다. 해결책은 상수도관과 하수도 시스템의 건설이었지만, 실제로 모든 도시가 똑같이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운하는 악취 나는 개방형 하수구 역할을 했다. 이에 비하면 중세는 오히려 레몬처럼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