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네덜란드의 탄생: 세 개의 문서가 낳은 독립 공화국

네덜란드는 약 1580년경,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확인하는 세 개의 중요한 문서를 통해 하나의 국가로 '탄생'했습니다. 역사학자 코스 하위선(Coos Huijsen)과 헤르턴 발링(Geerten Waling)은 위트레흐트 동맹, 오라녜 공 빌럼의 변명서, 그리고 버림 선언서(Placcaat van Verlatinghe)가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 리크스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마르크 뤼터 총리는 그에게 특별한 역사 문서 하나를 내보였습니다. 바로 '버림 선언서'였습니다. 이 1581년 작성된 방대한 문서에서 네덜란드 삼급회(States General)는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끝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승인받기까지는 1648년까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뤼터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네덜란드판 독립선언서라고 설명했습니다. 한 지역이 이런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군주와 결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은 이 문서에 담긴 특별한 논거, 즉 스페인 왕이 더 이상 네덜란드의 주권 군주일 권리가 없다는 논리를 토대로 삼았습니다. 백성은 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국민 주권의 본질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출생 증명서'가 된 세 개의 문서

버림 선언서는 역사학자 헤르턴 발링과 코스 하위선이 '네덜란드의 출생 증명서'라 부르는 세 문서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 둘은 1579년의 위트레흐트 동맹과 1581년의 오라녜 공 빌럼의 변명서입니다. 짧은 기간에 잇달아 등장한 이 세 문서는 스페인에 맞선 긴 독립 투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표시합니다.

11세에 프랑스 남부의 오라녜 백작령을 상속받은 나사우의 젊은 백작 빌럼은 반란의 지도자이자 새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최대 적수로 빠르게 부상했습니다. 펠리페는 1559년 빌럼을 홀란트·젤란트·위트레흐트의 총독(stadtholder)으로 임명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에서 프로테스탄트를 피바람처럼 몰아붙인 펠리페의 종교 박해에 대한 빌럼의 원칙적 저항 때문이었고, 이후에는 자유와 관용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국가 빌헬무스(Wilhelmus) 역시 1572년 무렵부터 점점 군사적 성격을 띠게 된 이 반란 초기의 산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이기도 합니다. '몸과 재산'을 반란에 바친 오라녜 공 빌럼을 노래한 이 영웅 찬가 속에서, 오라녜 공은 여전히 충성심의 갈등 속에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아마도 오라녜 공의 초기 측근이었던 마르니크스 판 신트알데혼더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속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국을 따라 나는 죽음까지 남으리라.' 그리고 이어서 '나는 언제나 히스파니아의 왕을 존경해 왔다.' 오라녜 공, 그리고 그와 함께 수많은 네덜란드인들은 네덜란드 조국과 스페인 왕 양쪽 모두에 충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한 개의 주인 것처럼' 연합하다

봉기의 시작점은 다소 임의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전통적으로 1568년 헤일리헐러(Heiligerlee) 전투를 기점으로 삼습니다. 1648년 공화국 승인까지가 정확히 80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세 '출생 증명서'가 만들어진 1580년 무렵에는 이미 80년 독립전쟁이 몇 해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580년 전후는 분명 이 투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570년대 말, 남부 네덜란드 주들은 반란, 특히 오라녜 공 빌럼의 종교 정책에 불만을 품습니다. 그들은 1579년 1월 아라스 동맹(Union of Arras)으로 결집해 펠리페 2세와 화해하고, 가톨릭을 유일하게 허용되는 종교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에 맞서 북부 7개 주는 총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오라녜 공의 지도 아래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며 위트레흐트 동맹으로 조직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출생 증명서인 위트레흐트 동맹에서 7개 지역은 '마치 단 한 개의 주인 것처럼' 결합되었습니다. 원본 문서의 머리에는 '동맹에 관한 조약, 영원한 서약과 화합'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문서는 서명국들에게 광범위한 재정적·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행정 권력의 중심은 만장일치로만 의결할 수 있는 삼급회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네덜란드에 1795년 공화국이 막을 내릴 때까지 유지되는 느슨한 의회 통치 체제를 부여했습니다.

변명서: 내전에서 정당한 저항으로

1580년 여름, 펠리페 2세는 오라녜 공 빌럼을 법적으로 배척하고 그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이에 빌럼은 싸움을 계속하고 왕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긴 변명문을 썼습니다. 변명서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호소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강력한 선전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오라녜 공은 봉기를 정당화하고, 내전을 외세 억압자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 재규정하려 했습니다.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인들이 성실한 마음으로 펠리페 2세의 조상들에게 복종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폭군적 행보를 보인 펠리페가 그 서약을 스스로 파기했기에, 오라녜 공 빌럼 역시 왕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네덜란드인에게 해당되는 이치였습니다. 변명서에서 오라녜 공은 펠리페가 저지른 폭정의 온갖 학대 사례들을 하나하나 열거했습니다. 이는 오라녜 공 자신의 대스페인 투쟁에 대한 정당화였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민중 전체의 투쟁에 대한 정당화였고, 나아가 왕을 떠나 새 주권자를 추대할 삼급회의 정당성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단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버림 선언서, 즉 네덜란드의 독립선언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버림 선언서 역시 정치 이론과 선전의 교묘한 결합이었습니다. 삼급회가 스페인 왕을 떠나는 결정이 정당한 군주에 대한 반역처럼 비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란 중인 네덜란드는 모든 외국의 원조를 잃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주와 백성, 사회계약의 뿌리

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방대한 설명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결정이 자명하지 않았으며 대담한 정치적 행보였음을 보여줍니다. 버림 선언서의 문구는 혁명적이었습니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이 문서는 봉기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억압받는 백성이 어떻게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청사진이 되었습니다.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 관해 이 칙령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의 백성은 군주의 필요를 위해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군주는 오히려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백성이 없다면 그는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군주와 백성 사이의 일종의 상호 합의, 즉 사회계약이라는 이 사상은 훗날 영국의 존 로크 같은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고,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근대적 사유의 뿌리는 상당 부분 네덜란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 문서들은 헤이그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al Archief)에서 직접 볼 수 있으며, 버림 선언서, 위트레흐트 동맹, 변명서가 모두 그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