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역사에서 연구자들은 주로 떠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환경에 주목해 왔다. 뒤에 남겨진 이들은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덜 흥미로운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왜 어떤 사람들은 이민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남기를 택하는 걸까? '경계'를 주제로 하는 역사의 달을 맞아, 이주를 철학의 눈으로 조명해 본다.
탐험은 서양 문화의 DNA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일은 오랫동안 서양 문화의 핵심이었다. 고대부터 서사시는 미지의 땅을 향한 여정과 모험을 찬미했다. 문제는 강조점이 언제나 여행자, 즉 떠나는 쪽에 있다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 남겨진 이들에게는 "정신 차려"라고 말할 뿐이다. 설령 두 사람이 다시는 만날 수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별에 그토록 많은 슬픔이 따른다면, 우리는 왜 이민을 떠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아픔은 특히 남겨진 이들을 더 깊이 파고드는 걸까?
대항해의 시대
역사를 돌아보면 탐험의 항해를 떠난 것은 주로 유럽인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비롯한 위대한 발견 이후 탐험 붐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미지의 세계와 민족, 동식물, 자원을 찾는 일에는 점점 더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었고, 집에 머무는 것은 덜 매력적인 선택지로 취급되었다.
19세기 증기선의 등장으로 원거리 여행은 더 많은 이들의 손이 닿는 곳이 되었다. 180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무려 6천만 명이 넘는 유럽인이 다른 대륙으로 떠났다. 한동안 유럽은 진정한 이민자 배출 대륙이었고, 반대 방향으로 건너오는 비유럽인은 많지 않았다.
당시 여행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위험했으며 비용도 컸다. 그래서 대부분이 편도였고, 본국과의 연락 또한 고단했다. 오랫동안 편지 쓰기가 거의 유일하게 감당 가능한 수단이었지만, 그 소중한 소식들이 목적지에 닿기까지는 몇 주가 걸렸다.
죽음만큼 무거운 이별
이주가 사실상 영구적이었고 접촉의 기회가 극도로 드물던 시절, 사랑하는 사람의 출발은 죽음에 의한 상실과 거의 같았다. 가족들이 다시 만날 확률은 사실상 0에 수렴했고, 그리움—특히 남겨진 이들에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어째서 특별히 이 집단일까? 철학자 마르리 하위어르(Marli Huijer)는 저서 『남겨두고(Achterblijven)』에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존재와 무』를 빌려 이 현상을 설명한다.
핵심은 이렇다. 남겨진 사람은 둘이 함께했던 장소에서 떠난 사람의 흔적을 계속 느낀다. 그러나 이 아픔을 겪는 것은 오직 남겨진 자뿐이다. 그는 여전히 함께했던 공간을 오가지만, 떠난 사람은 그곳에 오지 않으니까. 게다가 이민자는 새 터전에서 새 삶을 꾸리느라 분주하다 보니, 집에 있었을 때만큼 애도할 여유조차 없다.
오늘날 세상은 한결 좁아 보인다. 비행기가 거리를 쉽게 메워 주고, 화상 통화로 지구 반대편에서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작별은 더 이상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민의 극적인 면모는 크게 옅어졌다. 그러나 이민은 여전히 아프다. 하위어르가 말하는 이 '작은 죽음'은 남겨진 이들이 결핍을 견디는 일을 조금도 쉽게 만들지 않는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알 때는 오히려 그 사람과 마음의 거리를 두기가 쉽다. 그러나 상대가 돌아올 거란 희망이 남아 있는 한, 결핍과 그리움은 끝없이 마음을 갉아먹는다.
왜 인간은 떠나는가
그렇다면 이토록 큰 상실과 슬픔이 따르는데도 사람들은 왜 떠나는 걸까?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내놓았다. 사냥채집인의 DNA 탓이라는 설도 있다(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을 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탐욕이 인간을 이동시켰다고 보았고, 칸트는 전쟁의 참화가 인간을 떠돌이로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하위어르가 인용한 이민 통계는 생각과 달리 인간이 그리 이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전 세계 인구 중 이민자 비율은 글로벌화에도 불구하고 3% 수준에 머물러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은 익숙한 환경과 문화에 머무는 것을 선호한다. 대규모 이민이 일어날 때는 주로 부정적인 이유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대이동이 대표적이다. 일자리와 주택, 그 밖의 전망이 부족하자 당시 50만 명이 넘는 네덜란드인이 캐나다·미국·호주로 떠났다. 그 후손이 가족 안에 없는 이가 누구겠는가?
거꾸로 된 세계
오늘날 좋은 여건 덕분에 유럽은 더 이상 이민 배출 대륙이 아니라 오히려 피난민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구유고슬라비아 분쟁을 제외하면) 평화가 이어졌고 식량이 부족하지도 않다. 유럽인이 다른 대륙으로 피신할 필요는 크게 줄었다. 그렇다고 이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문화에서 세상을 구경하는 일은 여전히 모험적이고 개방적(open-minded)인 삶과 동일시된다. 집에 머무는 사람은 시야를 넓힐 기회를 스스로 내던지는 셈이다. 단, 오늘날 떠나는 것은 주로 일, 유학, 자기 성장을 위해 이동하는 비교적 부유한 유럽인들이다.
과거와의 차이는 단지 기술 덕분에 본국과의 연락이 쉬워졌다는 데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본국'이라는 안전판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다. 많은 유럽인에게 이민은 영원한 작별이 아니며, 하위어르는 이들을 '준이민자(semigrant)' 혹은 '라이프스타일 이민자'라고 부른다. 반면 19세기 이민자의 최대 집단이었던 가난한 유럽인에게 이민은 한결 어려워졌다. 캐나다와 미국 같은 인기 이민 국가는 더 이상 자금과 학력이 없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전의 유럽인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났고 돌아갈 길도 없었다. 지금은 주로 부자들이 떠돈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을 항공편으로 불러옴으로써 아픈 이별을 오랫동안 피할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대륙의 빈곤, 전쟁, 기근, 자연재해는 그런 선택지를 주민들에게서 빼앗아 간다. 편도 티켓 한 장을 들고 최선을 바라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유일한 희망인 경우가 많다.
남겨짐을 다루는 철학
이 글은 마르리 하위어르의 『남겨두고: 경계 없는 세계를 위한 새로운 철학』(Boom Uitgevers Amsterdam, 2016)을 바탕으로 했다. 이 철학 에세이는 매우 읽기 쉽게 쓰였는데, 하위어르의 위치를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녀는 네덜란드의 '국가 사상가(Thinker Laureate)'를 지냈고, 로테르담 에라스무스대학교의 공공철학 특임교수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주를 낯설지만 환하게 조명하며, 개인적 일화를 곳곳에 녹인 생생한 예시를 통해 독자를 이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거 이민을 떠난 네덜란드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라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Andere Tijden의 '캐나다 이민' 편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