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히틀러가 연출한 선전의 무대

"우리는 파리지엔스보다 더 매력적이고, 빈 사람들보다 더 경쾌하며, 로마인보다 더 활기차고, 런던 사람들보다 더 국제적이며, 뉴요커들보다 더 실용적이어야 한다."

1936년 7월 5일, 요제프 괴벨스의 베를린 선전 신문 데어 앙그리프(Der Angriff)는 이렇게 보도했다. 베를린 하계 올림픽 개막까지 이제 4주 남짓한 시점이었다.

나치 정권과 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미 1931년, 아돌프 히틀러와 반유대주의 정당 NSDAP이 집권하기 2년여 전에 1936년 대회를 독일 수도에 배정해 두었다. 그러나 히틀러 본인은 처음에는 이 스포츠 축제에 큰 호감이 없었다. 나치 이념에 따르면 스포츠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고, 오직 '우월한 아리아 인종'과 국가를 찬양하는 수단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또한 히틀러는 올림픽의 국제적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들은 평화로운 스포츠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충돌해야 할 대상이었다.

결국 미국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가 독일 내 유대인 처우에 항의하며 불참을 검토하겠다고 위협하자, 히틀러는 물러섰다. 만약 IOC가 대회 개최지를 변경하기로 결정한다면 독일의 국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치 정권은 이를 역이용해, 올림픽 개최를 통해 독일이 그 어떤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들었다.

'반(半) 유대인' 선수들

제3제국의 어두운 면은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해야 했다. 뉘른베르크법 공포 이후 유대인을 향한 괴롭힘과 노골적인 폭력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런 모습을 더는 방치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광적인 나치 당원들은 일시적으로 입막음되었고,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 따라 거의 모든 마을과 도시 길가에 세워져 있던 '유대인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표지판 같은 반유대주의 문구들이 철거되었다.

한편 베를린에서는 열기를 넘치는 속도로 공사와 도색, 리모델링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대회의 핵심 무대는 새로운 올림픽 스타디움이었다. 건축가 베르너 마르흐(Werner March)의 첫 설계안을 본 히틀러는 분노하며 그것을 '현대식 유리 상자'라고 일축했다.

히틀러는 늘 그렇듯 유치한 분노 폭발을 일으키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대회를 통째로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원한 것은 더 고전적이고 위압적인 스타디움이었다. 그의 집 설계자이자 절친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재빨리 새 스케치를 그려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디움이 베를린에 세워졌지만, 히틀러는 공사 과정에서조차 모든 것이 너무 작다며 불평을 거듭했다.

반유대주의 법규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독일 올림픽 대표팀에 유대인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체육 지도부는 유대인 선수를 영입하려 시도했으나, 1933년부터 유대인은 전문 훈련 시설 사용 자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예선을 통과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독일이 반유대주의 국가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유대인 혼혈' 선수 세 명이 발탁되었다.

성화 릴레이와 개막식

개막식은 8월 1일 거행되었다. 베를린 곳곳에서 하켄크로이츠(스바스티카) 깃발이 올림픽기와 나란히 게양되었고, 스타디움에는 11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거대한 체펠린 비행선이 올림픽기를 펄럭이며 상공을 선회했다. 히틀러가 입장하자 3천 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Deutschland über Alles)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치당의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도 함께 연주되었다.

음악이 끝나자 거대한 올림픽 종이 울렸다. 많은 선수들이 히틀러와 요인들이 자리한 단상을 지나며 나치식 경례를 올렸다. 미국과 영국 선수단은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나라는 나치식 경례와 매우 흡사한 올림픽 경례조차 생략했다.

유럽의 미래는 독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치는 완전히 새로운 장치를 준비했다. 바로 '올림픽 성화'였다.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든 주자들이 릴레이로 베를린까지 전달한 것이다.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로 명성을 얻은 영화 선구자 레니 리펜슈타일은 히틀러의 의뢰로 대회 영화를 제작하게 되면서, 이 장면을 자신의 작품 올림피아(Olympia)에서 인상적으로 담아냈다.

개막 선언이 끝나고 5천 명의 선수들이 메달을 놓고 겨루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독일 선수들의 첫 승리를 축하하고자 하자, IOC는 명예 손님으로서 특정 국가의 선수만 골라 축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두를 축하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축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시인의 우월한 육체'

물론 히틀러는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무려 금메달 네 개를 획득한 미국의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Jesse Owens) 같은 '열등 인종'과 악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사적으로 오언스의 압도적인 우승에 매료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오언스의 승리를 "원시인의 우월한 육체적 능력" 탓으로 돌렸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측근들에게 확언했다.

히틀러의 계획대로라면, 그가 오래 전부터 구상해 온 정복 전쟁 이후에는 올림픽이 영구히 베를린에서 열리고, 백인이 아닌 선수들의 참가는 금지될 예정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대회의 선전적 연출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히틀러에게 다행히도 독일은 실제로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 아마도 정권이 선수들에게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테스토스테론을 제공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이 대회는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 중계가 이루어진 대회이기도 했다. 물론 거친 화질의 영상은 베를린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다. 대신 라디오 기자들이 전 세계에 베를린의 볼거리를 생생히 전달했다. 많은 외국 방문객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새로운 독일'에서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위장된 포옹

미국의 비판적 언론인 윌리엄 셔러(William Shirer)는 이 점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나치가 자기네 선전을 제대로 해낸 것이 아닌가 두렵다. 첫째, 그들은 전례 없는 규모로 올림픽을 조직해 선수들을 만족시켰다. 둘째, 일반 방문객들, 특히 사업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나치 시대 내내 정확한 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해진 드레스덴 출신의 독일계 유대인 빅터 클렘페러(Victor Klemperer)는 이렇게 적었다.

"이 올림픽은 스포츠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철저히 정치적인 행사다. 국민과 외국 방문객들에게 끊임없이 각인되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 제3제국의 부활, 번영, 새로운 정신, 단합, 영광, 그리고 물론 평화로운 면모를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전 구호는 잠시 금지되고, 유대인에 대한 비방과 전쟁을 부추기는 언어, 독일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이 8월 16일까지 사라진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밤낮으로 사방에서 펄럭인다."

클렘페러의 판단은 완전히 정확했다. 제3제국이 세계에 드러낸 다정한 포옹은 기만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잠시 동안 독일은 친근한 인상을 심어줘야만 했다. 유대인의 차례는 그 후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