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활기 넘치던 중세 도서 산업, 현대 출판업과 닮은 필사본 시장의 비밀

중세에도 책이 읽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그 책들이 반드시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구에 따르면 13세기부터 이미 체계적으로 조직된 도서 무역이 존재했으며, 필사본은 이윤을 위해 작성·장식·판매되었다. 이윤과 경쟁이 판을 치던 그 시대에서 우리는 현대 출판 산업의 윤곽을 엿볼 수 있다.

역사가 G.R. 엘턴(G.R. Elton)은 "과거는 외국과 같아서, 사람들이 일을 다르게 처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세계와 수백 년 전 세계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점이 곳곳에 숨어 있다. 중세 도서 역사가로서 인쇄술 발명 이전 독자들이 글을 읽던 매개체, 즉 손으로 쓴 책 '필사본'을 들여다보면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언뜻 보면 이런 '필사본'은 오늘날의 인쇄본은 물론 전자책과도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소가죽을 다듬어 만든 양피지 위에 깃펜이나 갈대 펜으로 쓰인 중세의 책은 서점에서 구매하거나 전자책 리더기로 다운로드하는 현대의 책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공통점이 드러난다. 중세와 현대의 페이지는 폭과 높이의 비율이 거의 같고, 각주와 페이지 번호, 장 제목도 갖추고 있으며, 행 끝은 양쪽 모두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제작 방식, 즉 펜이냐 인쇄기냐에 있을 뿐, 독자에게 텍스트가 전달되는 방식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

더욱 흥미로운 유사점은 도서 거래에서 나타난다. 중세의 도서 시장은 놀랍도록 현대적이었다. 서점을 생각해 보자. 이미 14세기의 도시에서는 서점을 찾아가 마치 간식을 주문하듯 책을 주문할 수 있었다. 원하는 텍스트와 형태를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한 단으로 쓸지 두 단으로 쓸지, 페이지 번호와 삽화를 넣을지 말지, 양피지에 쓸지 종이에 쓸지, 어떤 크기로 만들지까지 지정할 수 있었다.

주문 후에는 책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최대 1년까지 걸리기도 했다. 중세에는 재고로 쌓아둔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값이 워낙 비싸 미리 만들어 둘 수 없었다. 때로는 서점업자가 직접 주문받은 책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겸업은 중세 도서계에서 흔한 일이었는데, 제본 장인이 삽화를 그리고 필사가가 책을 팔기도 했다. 수도원의 필사 승려들과 달리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고, 아니 추구해야만 했던 이런 직업 필사가들은 온갖 영리한 수법으로 고객을 유치하는 데 능숙했다.

예를 들어 '필기 견본지(writing sheets)'라 불리는 물건이 전해진다. 최대 스무 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서체 샘플을 보여 주는 양피지 판으로, 각 서체의 이름은 짧은 시험 글씨 아래에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덕분에 고객은 주문할 때 필사가들의 전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시편을 로툰다(littera rotunda) 서체로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면 되었던 것이다.

중세에도 있던 마케팅

필기 견본지의 뒷면이 하얗게 비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것들은 벽에 걸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가게 문밖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 견본지에는 "글을 써 달라는 분은 이 안으로 들어오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구들은 오늘날 광고 카피의 선구격으로, 후기 중세 장인들이 자신의 상품 홍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 주는 우아한 간판이다.

이런 중세식 마케팅의 흔적은 책 속에서도 발견된다. 파리에서 대가를 받고 책을 쓰던 헤르네이스(Herneis)라는 필사가는 프랑스 법률 필사본의 뒷면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누군가 이토록 아름다운 책을 원한다면, 파리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으로 나를 찾아오시오."

우리가 파리의 서점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중세 세무 당국의 장부가 상당 부분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대성당 맞은편 거리에는 필사가와 제본 장인은 물론, 그림을 그리는 채색 장인(일루미네이터)까지 헤르네이스 같은 장인 수십 명이 모여 살았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거리의 장인들은 긴밀한 공동체를 이루어, 분쟁이 법정까지 번질 때 서로를 위해 증언해 주기도 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관련 장인들이 한 거리에 모여 있으니 매우 편리했다. 책이 필요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전문 상점가와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요즘에도 '양피지 거리(parchmentstraat)', '필사가 골목' 같은 거리 이름에서 책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런 집적 현상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하청 계약과 협업, 그리고 소송까지

동료들이 바로 근처에 산다는 것은 서점업자에게도 유리했다. 그는 필사가로서 돈을 벌 뿐 아니라 중개인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주문량이 너무 많거나 작업이 지나치게 전문적이면 다른 장인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다. 한 이웃은 자신보다 뛰어난 화가였을 수 있고, 또 다른 이웃은 기꺼이 텍스트 필사를 도왔다. 이렇게 협업하면 제작 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고객은 반년만 기다리면 됐다.

이런 경우 서점업자는 '임시 작업자'가 할 일과 보수를 명시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책 제작 과정에서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품질이 기준에 미치는지 수시로 점검했다.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납품된 작품의 대금 지급을 거부한 상인이, 아마도 결과물의 품질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채색 장인에게 소송을 당한 사건도 전해진다.

연구에 따르면 서점업자들은 주로 같은 장인 그룹과 반복해서 협업했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어깨동무가 된 이웃들이었다. 이런 집단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친분이 깊은 채색 장인과 필사가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힘을 합쳐 탄생시킨 것이 바로 중세 최고 수작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책들이다.

붓으로 큰돈을 벌기는 어렵다

중세 도시에는 도서 중심지 바깥에서도 직업 필사가들이 활동했다. 1400년경 에흐몬트(Egmond)의 학교 교사가 수도원을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제작했는데, 이는 수도원의 도서 생산이 얼마나 쇠퇴하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시청의 필기실인 관청(chancellery)에서 일하던 서기들의 상업 활동도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들은 본래의 업무가 끝난 저녁 시간에 부업으로 책을 만들었다.

그들이 돈을 받고 만든 책은 특유의 약어 사용법이나 종이 접는 방식 같은 관청 특유의 특징으로 식별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성직자 출신 서기들은 14세기 중반경, 수도사들보다 훨씬 앞서 종이로 만든 문학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이 '열등한' 재료를 경멸하며 의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은 중세에도 붓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큰부자가 되는 길은 아니었다. 1450년경 네덜란드 연대기의 뒷면에는 불평 섞인 필사가의 글이 남아 있다. "이 정도 금액으로는 다시는 책을 만들지 않겠소!" 이 대목은 책 필사가들이 대개 학교 교사나 서기 같은 다른 직업을 겸직했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마르기 시작한 잉크병

15세기 중반 인쇄기가 발명되면서 이 손글씨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필기 견본지는 벽에서 사라지고 잉크병은 말라붙었다. 필사가는 이제 인쇄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초대형 책, 예컨대 대형 성가집이나 매우 구체적인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고급 사본 제작에만 필요하게 되었다.

인쇄술의 등장으로 필사본은 구식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펜을 놓지 않은 소수의 전문가들은 인쇄물의 획일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객의 요구에 맞춘 맞춤형 걸작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장인의 뛰어난 기술조차 도서 산업 전체의 대변혁을 막지는 못했다. 많은 업체가 기계 생산 방식의 파도에 휩쓸려 파산했고, 다른 업체들은 인쇄본 제작으로 진로를 바꿨다. 여기서도 우리 시대와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잉크가 픽셀에 자리를 내주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책의 모습 앞에서, 오늘날 서점과 출판업이 끊임없이 적응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