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2월 26일, 아말리아 플레밍(Amalia Fleming)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의사이자, 페니실린을 발명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의 아내였으며, 동시에 정치인이자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바친 저항 운동가였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의사
아말리아 플레밍은 1912년 6월 28일 이스탄불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그 도시에서 명망 높았던 피부과 의사 하릴라오스 쿠추리스(Harilaos Koutsouris)의 딸이었다. 그녀는 아테네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파리(넥케르 병원에서 근무)와 런던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국민저항운동과 알렉산더 플레밍과의 인연
제2차 세계대전 점령기 동안 그녀는 국민저항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45년에는 영국문화협회(British Council) 장학금을 받아 런던으로 건너가 노벨상 수상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곁에서 라이트-플레밍 연구소(Wright-Fleming Institute)에서 1949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그리스로 돌아와 에반겔리스모스 병원(Evangelismos)의 원장직을 맡았다.
1953년에는 알렉산더 플레밍과 결혼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2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1955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칭호를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기사(Sir)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레이디(Lady)' 칭호를 갖고 있었다.
군사독재에 맞선 투쟁과 고문의 시간
군사독재 시절 그녀는 강력한 반독재 활동을 전개하다가 1971년 8월, 알렉코스 파나굴리스(Alekos Panagoulis)의 탈옥 계획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무려 25일간 집중 심문을 받으며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아테네 비상군사법정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까지 선고받았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아말리아 플레밍의 구금이 국제 사회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여 그녀를 석방하고 추방했으며, 나아가 그리스 국적마저 박탈했다. 그녀는 런던으로 떠났고, 독재 정권이 붕괴한 후에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그녀는 군사정권의 고문 기관 EAT-ESA 가해자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독재 시절 심문 과정에서 환각제와 각종 약물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PASOK 소속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그녀는 1977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81년과 1985년에는 PASOK(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소속으로 아테네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소속 정당의 방침이라 해도 묵묵히 따르지 않았다. 민주방위(Democratic Defense)와 PAK 간부들이 축출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에게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는 등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유럽평의회 의회 총회에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986년 2월 26일, 그녀는 바리(Vari)에 설립된 '알렉산더 플레밍 기초생물의학연구재단'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재단은 그녀가 사망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설립되었다.
여성 과학자 단체와 인권·평화 운동
아말리아 플레밍은 그리스 여성과학자협회(SEE) 회장도 역임했으며, 1965년에는 에우포이아 훈장(Order of Eupoias)을 수상했다.
동시에 그녀는 인권, 여성의 권익, 평화를 위한 활동에도 헌신했다. 국제앰네스티 그리스 지부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데모크라틱 케어(Democratic Care), 인권연합, 정치적 난민 송환 위원회, 터키 민족 해방 및 공화국 위원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