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로 꼽히며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는 1998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산은 막대하다. 1,300곡이 넘는 노래와 50편이 넘는 영화 출연이 바로 그 증거다.
그는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고, 1997년에는 의회 금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을 수여받았다. 여기에 평생공로상을 포함해 그래미 어워드 총 11회를 거머쥐었다.
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듭했다. 1953년 영화 『지옥의 영웅들(From Here to Eternity)』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황금 팔의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Arm)』에서의 열연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전성기의 그는 “모든 여자는 그를 갖고 싶어 하고, 모든 남자는 그가 되고 싶어 한다”는 평판을 누렸다. 그리고 ‘여자’라고 말할 때, 심지어 마피아 세계의 여인들까지 포함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FBI의 40년 감시
시나트라는 평생 동안 FBI의 감시 대상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FBI는 이 가수와 마피아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고, 2000년 출간된 딸 티나 시나트라의 회고록에도 이러한 ‘어두운’ 관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history.com에 따르면, FBI는 약 40년 동안 그를 추적했다. 그의 행적, 발언, 접촉 인물들을 기록한 파일은 수천 페이지에 달한다. 1998년 사망 후 공개된 기록들은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들로 가득했다.
시나트라가 FBI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의사에게 4만 달러를 지불하고 징집 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의혹이었다. FBI는 건강상 면제가 정당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소문은 1940년대 후반 내내 그의 커리어를 괴롭혔다.
요란한 사생활로도 유명했던 그의 경력은 알 카포네 등 조직 보스들과의 연루설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심지어 그가 1960년 존 F. 케네디의 선거운동 지원을 위해 시카고 마피아 보스 샘 잔카나(Sam Giancana)를 케네디에게 소개한 장본인이라는 믿음도 있다. 딸 티나의 증언에 따르면, 케네디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는 잔카나의 클럽에서 공연까지 펼쳤다.
또한 시나트라는 케네디를 잔카나의 연인 주디스 캠벨 엑스너(Judith Campbell Exner)에게 소개했는데, 그녀는 양측 사이를 잇는 비공식 연락책 역할을 했다.
1972년 7월 18일, 그는 하원에서 마피아와의 관계에 대한 증언을 요구받았지만, 어떤 구체적 사건과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탈리아계였던 그는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와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삼촌 중 한 명은 갱단 멤버였다.
기밀 해제된 FBI 파일에 따르면, 그는 럭키 루치아노(Lucky Luciano), 버그시 시겔(Bugsy Siegel), 윌리 모레티(Willie Moretti), 그리고 알 카포네의 사촌인 피스케티 형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피스케티 형제에게 받은 선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시나트라의 친구이자 재능 있는 코미디언 제리 루이스는 시나트라가 마피아를 위해 검은돈을 운반했다고 폭로했다. 시나트라는 이 소문을 부인하며 자신은 예술 장비를 옮겼을 뿐이며, 미국 밖으로 200만 달러를 반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노먼 메일러는 시나트라가 들고 다니던 가방에는 200만 달러가 넘게 들어 있었다며 그의 해명을 일축했다.
시나트라는 미국 전역의 클럽을 장악한 조 피스케티(Joe Fischetti)와도 가까웠다. 두 사람은 함께 하바나를 방문하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벌어진 호화로운 파티 소문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았다.
‘올 블루 아이즈’의 화려한 귀환
쿠바에서 함께했던 인연들은 그의 라스베이거스 시절에도 곁을 지켰다. 늘 되살아나는 법을 알았던 그였지만, 첫 번째 ‘추락’은 30세 무렵 찾아왔다. 더 젊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이 부상하면서 그의 빛은 잦아들었고, 꿈꾸던 TV 진출에도 실패했다. 1951년에는 자살을 시도했다고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1953년, 그는 『지옥의 영웅들』에서 인생 최고의 배역을 손에 넣었고,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완벽하게 컴백에 성공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해결책”
소문에 따르면 컬럼비아 스튜디오의 보스는 처음에 시나트라를 원하지 않았지만, 악명 높은 갱스터 조니 로셀리(Johnny Roselli)의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을 돌렸다. 로셀리는 “시나트라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좋은 해결책”이라고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시나트라가 ‘갱스터 콤플렉스(hood complex)’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스포트라이트에 머물기 위해 갱스터와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어두운 화려함을 즐겼다는 것이다. 또한 후버에 따르면, 시나트라는 스스로 FBI의 ‘기밀 정보원’이 되겠다고 제안했지만 FBI는 이를 거절했다. 그의 목표는 물살린 이름을 ‘씻어내는’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마피아가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청할 때마다 시나트라는 흔쾌히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피아 역시 라스베이거스를 도박과 엔터테인먼트의 수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의 화려함에 크게 의존했다. 실제로 시나트라는 마피아 소유의 두 호텔에 출연하며 총수익의 2%를 가져가기도 했다.
FBI 기록에는 1963년 아들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의 납치 사건도 남아 있다. 그는 수사기관에 적극 협조했고, 범인들이 요구한 몸값을 지불했으며, 결국 범인들은 체포되었다. 그 자신도 FBI가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1979년과 1980년에는 자신의 활동이 기록된 파일 열람을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서류는 그에게 넘겨졌지만, 그를 유죄로 만들 만한 결정적 단서는 없었다. 그의 파일은 무려 2,403페이지에 달했다.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장관으로서 마피아 소탕 작전에 나섰을 때, 마피아들은 시나트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딸의 회고에 따르면, 잔카나 본인이 그의 살해를 거부했다고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그는 반인종차별 발언을 아끼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열렬히 지지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네 번의 결혼,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생애 네 번의 결혼을 했다. 1939년 낸시 바르바토(Nancy Barbato, 모레티 조직 고위 간부의 사촌이기도 했다), 1951년 전설적인 배우 에이바 가드너(Ava Gardner), 1966년 미아 패로(Mia Farrow), 1976년 바버라 막스(Barbara Marx)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슬하에 낸시, 프랭키 주니어, 티나 시나트라 세 자녀를 두었다.

1998년 5월 14일, 그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캘리포니아의 데저트 메모리얼 파크(Desert Memorial Park)에 안장되었다.
그의 관에는 담배 한 갑, 라이터 하나, 잭 다니엘스 한 병, 그리고 10센트짜리 동전 열 개가 함께 놓였다고 전해진다. 20세기를 풍미한 목소리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