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조그 1세(Zog Ⅰ): 그리스 메탁사스 정부로 망명한 알바니아의 유일한 왕

조그 1세이자 마지막 왕(Zog Ⅰ)은 아마도 20세기에서 가장 기묘했던 군주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타임스(The Times)와 알바니아 지도자의 전기를 쓴 제이슨 톰스(Jason Tomes)는 그를 그렇게 평가했으며, 그에게 "낭만의 마지막 군주(the last lord of romance)"라는 별명도 붙여주었습니다. 전기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조그는 서부극, 클래식 음악, 그리고 찰리 채플린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왕좌를 만들어낸 인물이자, 유럽에서 유일한 무슬림 국왕이었습니다. 1895년, 나라가 아직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시절 아흐메드 베이 조골리(Ahmed Bey Zogolli), 즉 아흐메드 주구(Ahmed Zogu)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알바니아와 망명지를 오가며 살다가 1924년, 유고슬라비아의 지원 아래 부유한 알바니아 가문들과 사업가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모집한 용병 부대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혼란에 빠져 있던 나라에서 그는 빠르게 독재자로서 입지를 다졌고, 1925년에는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1928년 알바니아 국민의회는 해산되었고, 새로 구성된 헌법제정의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알바니아를 왕국으로 선포하고 주구를 '알바니아인의 왕(King of the Albanians)' 조그 1세로 개칭했습니다.

새 헌법은 알바니아 상원을 폐지하고 단원제 의회를 도입했지만, 조그 국왕은 대통령 재직 시절 확보했던 강화된 권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헌법제정의회에 의해 알바니아에 군주제가 수립되고 조그는 공식적으로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이 왕국은 '스칸데르베그의 중세 왕국'의 후계자로 선포되었으나, 사실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의 일이었습니다.

즉위 직후 조그는 전직 총리 셰프체트 베를라치(Shevqet Verlaci)의 딸과의 약혼을 파기했습니다. 이에 베를라치는 국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를 겨눈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몇 년간 조그는 수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강력한 경호팀의 보호를 받으며 공개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1931년 빈을 방문했을 때에는 국립 오페라 극장 입구에서 벌어진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보호' 아래

알바니아는 발칸 협약(Balkan Pact)에 가입할 수 있는 처지였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경제·재정적 종속이 그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유럽의 어떤 왕실도 그를 왕조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한몫했습니다.

1926년 11월, 이탈리아와 알바니아의 외교 대표단은 티라나 조약(Treaty of Tirana)에 서명했고, 이로써 이 발칸 국가는 이탈리아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1927년에는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고, 이윽고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고립된 가운데 경제 사정마저 열악했던 알바니아는 수십 년 동안 다른 발칸 국가들에 비해 사회·교육 발전에서 크게 뒤처져 있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까지 도시 인구는 전체의 13%에 불과했고, 인구의 상당수가 문맹 상태였습니다. 농민의 약 90%는 목제 쟁기 같은 낡은 방법과 도구로 생계형 농사에 의존했습니다. 지금은 비옥한 땅이 된 곳의 상당 부분이 당시에는 늪지였습니다. 은행 시스템도, 철도도, 현대적인 항만도, 실질적인 군대나 대학, 근대 언론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알바니아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출생률을 기록하는 동시에 가장 높은 유아 사망률을 보였고, 기대수명은 38세를 넘지 못했습니다.

1929~1933년 세계 경제 위기 한복판이던 1931년, 조그 국왕은 이탈리아에 1억 금 프랑의 차관을 요청했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이를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1932년과 1933년 알바니아는 이자조차 갚지 못했고, 이는 나라와 군주 모두를 더욱 깊은 이탈리아 종속의 늪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대가로 이탈리아는 군대, 왕립 헌병대, 은행 등 요직에 이탈리아 출신 기술 관료와 장교를 임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무역 분야에서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는 통상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한편 조그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에서 행했던 것처럼 이슬람법을 폐지하고 스위스 민법으로 대체하는 등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산업과 인프라 발전에도 힘을 쏟았지만, 나라 자체가 군주의 야심을 받쳐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유럽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는 즉위 초부터 유럽 귀족 가문 출신의 배우자를 물색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탐색 끝에 1938년 4월 헝가리 카롤리 가문 출신의 제랄딘 백작부인(Geraldine Apponyi)과 결혼했고, 1939년 4월 5일에는 간절히 바라던 후계자 스켄더 왕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다시 한번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망명

마침내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 왕국이 알바니아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상당 부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며 영토를 넓히는 모습을 본 무솔리니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무솔리니의 근본적인 야망은 그리스를 공격해 '고대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지만, 그러려면 알바니아 같은 지리적 '발판'도 필요했습니다. 초기의 알바니아 무장 저항은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국왕과 정부는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으며 알바니아는 사실상 독립 국가의 지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탈리아 정권은 새 헌법과 함께 '괴뢰' 정부를 수립해 알바니아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식민지로 편입했습니다. 알바니아 왕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Vittorio Emanuele III)에게 넘어갔고, 그는 1943년 9월 3일 이탈리아가 철수할 때까지 통치했습니다.

조그와 왕비는 소규모 수행단과 함께 처음에 그리스로 피신했습니다. 당시 메탁사스(Metaxas) 정부는 즉시 국경을 개방해 망명을 허용했고, 왕가는 테살로니키에서 며칠간 머물렀습니다. 이후 증기선으로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파리로 옮겨 연합국에 조국을 위한 군사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파리 점령과 함께 알바니아 왕가는 알렉산드리아로, 이어 남아프리카로 피신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알바니아를 떠날 때 조그는 여전히 명분상 정통 군주였지만, 왕좌를 되찾으려는 진지한 시도는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과 이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알바니아 민족주의 운동을 짓밟았고, 약 46년간 지속될 스탈린주의 체제가 들어섰습니다.

공산 정권은 조그 국왕의 알바니아 입국을 금지했고,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망명자로 살았습니다. 한동안 런던 리츠 호텔에 머물렀던 그는 1961년 프랑스에서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