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데의 전사들
이 글은 필자가 얼마 전 이탈리아 뉴스 포털 news.it에 기고한 비평문으로, 프랑스 혁명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장면 중 하나인 방데 학살을 다룹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근대 최초의 집단학살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기 바랍니다.
방데 전사들의 상징
교과서 속에서 느낀 위화감
초등학교에서 처음 프랑스 혁명을 배웠을 때, 저는 선생님이 그 사건들을 열정적이고 경쾌한 어조로 설명하는 태도와 사실 자체 사이에서 심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요약 재판, 잘린 머리들, 쌓여가는 시신, 온갖 만행을 마치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거대한 국경일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했습니다.
"그럼 폭력은, 학살은, 그 끔찍한 참상들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쁜 놈들", 즉 응당한 대가를 받아 마땅한 자들, 배신자들, 기껏해야 빵을 훔친 간사한 자들, 제거되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근대 유럽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을 내걸었지만, 정작 그 원칙들을 가장 먼저, 가장 악질적인 방식으로 배신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은 거의 입에 담지 않거나, 기껏해야 두려움에 떨며 속삭일 뿐입니다. 마치 하찮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 혹은 새로운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했던 불가피한 대가인 것처럼요.
바로 그겁니다, '강요'라는 것.
공포정치의 무고한 희생자들
공포정치(Terror) 시절 단두대에서 처형된 남녀, 심지어 아이들까지 거의 대부분은 무죄였습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어떤 죄목도 없었고, 유일한 죄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그것이 위에서 강요하려는 것과 달랐다 해도 끝까지 관철하려 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혁명 지도자들 중 누구도, 그 원칙에 공감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논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문하고, 학살하고, 자비 없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신성하고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가치를 구실 삼아 무방비한 시민과 정적들에게 자행된 만행을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혁명 지도자들은 결코 박애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교활하고 야망 있으며 피에 굶주린 폭군들이었고, 정당한 민중의 불만을 깨끗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데 매우 능숙했습니다. 제거해야 할 '나쁜 놈들'은 결국 반대편에 선 모든 사람, 즉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감히 불복종한 남녀들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정반대일지언정,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공포와 자의와 만행에는 정치적 색깔이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역사를 통틀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진영, 깃발, 이데올로기, 제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내전의 발발
방데(Vendée)는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순수한 농민·기독교·왕당파 사회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내전으로 번진 도화선은, 시골의 젊은이들을 계속 징집해 전선으로 보내려던 국가에 대한 방데 주민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족과 밭일에서 떼어져 나가야 했고, 이미 불공정한 세금과 잦은 기근에 시달리던 농촌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성심(Sacré-Cœur)의 깃발 아래 싸운 방데 사람들은 용감하고 이상주의적이었지만, 수와 장비에서 열세였습니다. 그들은 파리에서 온 '박애적' 군대에게 문자 그대로 학살당했고, 11만 7천 명 이상이 들판에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역사상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
충격적인 것은 막대한 희생자 수만이 아닙니다. 살해에 동원된 정교하고 전례 없는 잔혹함이 더욱 섬뜩합니다. 사람들을 무리 지어 묶어 뗏목에 태운 뒤 강물에 가라앉혔고, 어떤 이들은 성벽 위에서 던져 죽었으며, 시신의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최악의 나치조차 부러워할 만한 짓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