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10월 14일, 잉글랜드의 운명을 결정지은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마지막 앵글로색슨 국왕 해롤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이 말에서 내려 도보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하나의 통념처럼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증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대 기록이 말해주는 것
헤이스팅스 전투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동시대 자료는 단연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입니다. 11세기 후반에 제작된 이 거대한 자수 그림에는 노르만 정복의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데, 흥미롭게도 태피스트리를 비롯한 당대 기록들은 해롤드가 말을 타고 전투에 임하는 지휘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도보로 싸운 왕'이라는 이미지는 당대의 목격담이라기보다 후대의 해석이 만들어낸 것에 가깝습니다.
도보 지휘설은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해롤드가 도보로 싸웠다고 믿게 되었을까요?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앵글로색슨 군대는 전통적으로 방패벽(shield wall)을 중심으로 한 보병 전술에 의존했으며, 하우스카를(housecarl)이라 불리는 정예 근위병들 역시 도보 전투의 명수였습니다. 둘째, 노르만 군대가 기병 돌격을 핵심 전력으로 삼은 반면 잉글랜드군은 기병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도 '왕 역시 걸어서 싸웠다'는 인상을 강화했습니다.
병사의 전투 방식과 지휘관의 위치는 별개
다만 병사들이 대부분 도보로 싸웠다고 해서 지휘관 역시 반드시 도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세 초기의 왕과 귀족들은 기동성과 시야 확보를 위해 말을 타고 전선을 오가며 지휘했고, 필요할 때 내려 싸우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해롤드 역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 질문 자체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결국 "해롤드는 왜 도보로 싸웠는가"라는 질문은 섣부른 전제 위에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도보로 싸웠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바이외 태피스트리 등 당대 기록이 보여주는 모습, 즉 말 위의 지휘관 해롤드의 모습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역사는 때때로 후대가 만든 이미지에 가려지곤 하는데, 헤이스팅스의 해롤드도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