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2월, 북군(미합중국군)은 테네시주의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을 연달아 함락하며 남북전쟁 개전 이래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포트 도넬슨 전투(2월 16일)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 준장이 남군에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해 승리하면서, 그랜트는 하룻밤 사이에 전국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서부 전선의 실질적 지휘자, 헨리 할렉
포트 헨리·포트 도넬슨 작전의 총지휘관은 미주리 관구(Department of the Missouri) 사령관 헨리 할렉(Henry Halleck) 소장이었습니다. 그는 두 요새 함락 직후 추가 진격 명령을 내리며 승기를 놓치지 않았고, 승리의 공신으로서 입지를 한층 굳혔습니다. 같은 해 3월에는 오하이오·미주리·캔자스 세 관구를 통합한 미시시피 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서부 전역의 방대한 병력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코린토 공성전: 신중함이 양날의 검이 되다
할렉은 테네시 강을 따라 남진해 남부 연합의 철도 요충지인 미시시피주 코린토(Corinth) 공략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1862년 4월 샤일로 전투 이후 그는 직접 야전 지휘를 맡았지만,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도 참호를 구축하며 극도로 느린 속도로 전진했습니다. 공격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5월 말부터 6월 사이 코린토를 무혈에 가까운 상태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워싱턴 소환, 북군 총사령관으로
코린토 함락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전쟁장관 에드윈 M. 스탠턴(Edwin M. Stanton)은 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 지휘 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링컨은 조지 매클렐런(George McClellan)이 포토맥군 사령관직만 유지하도록 한 뒤, 그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General-in-Chief) 자리에 할렉을 발탁했습니다. 이리하여 1862년 7월, 할렉은 워싱턴 D.C.로 소환되어 북군 육군 전체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총사령관 시절과 유산
워싱턴에서 할렉은 전략 수립, 각 전선 사령관 간 조율, 행정 업무에 주력했습니다. 야전에서 보여준 과도한 신중함 탓에 낮게 평가받는 순간도 있었지만, 링컨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전쟁 수행의 행정적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864년 3월 그랜트가 후임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자 할렉은 참모총장으로 자리를 옮겨 종전까지 북군의 인사·보급·병력 운송을 뒷받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