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가마쿠라 막부의 기둥, '어은과 봉공' 관계 알기 쉽게 해설

가마쿠라 막부의 기반이 된 것은 무사(사무라이)의 주종 관계였습니다. 이 관계는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군과 가신이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받는 상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막부 성립 이전인 11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치히토 왕(以仁王)이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에 대항해 거병하면서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훗날 가마쿠라도노(鎌倉殿)가 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였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질과 반도 무사들의 문제

요리토모가 헤이시(平氏) 타도를 내걸고 거병하자 반도(坂東) 무사들이 잇달아 그에게 모여들었고, 어느새 간토 지역 무사들을 이끄는 대군단이 되었습니다.

모치히토 왕의 호소에 응한 세력도 있었음에도, 왜 하필 요리토모가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세 가지로 꼽힙니다.

  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황실 혈통을 이은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였다.
  2. 요리토모의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는 간토 지역 무사들을 규합하던 실력자였다.
  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 반도 무사들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말기 반도 무사의 처우

반도 무사들은 조정 귀족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조정에서는 포상을 받지 못했으며, 불만을 드러내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로부터 가혹한 처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반도 무사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주고 포상해 줄 지도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영지 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간토 지역

당시 간토 지역은 무사들 간의 영지 다툼으로 혼란스러웠고, 무사들은 끊임없는 분쟁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토를 하나로 묶어 평화로 이끌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좋은 혈통에, 실력자인 아버지를 둔, 카리스마까지 갖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은과 봉공의 시작

이렇게 간토 지역을 다스릴 지도자로 기대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요리토모는 강력한 무사들을 하나로 묶으려면 조정과 무사 사이의 기존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입니다.

'어은과 봉공'이라는 말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하면 '주고받기(give and take)'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주군인 요리토모가 무사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이 '어은', 그 보답으로 무사들이 헤이시 타도를 위해 싸우는 것이 '봉공'입니다. 조정 > 무사라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win-win) 관계가 핵심입니다. 이 어은과 봉공의 계약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맺은 무사를 '고케닌(御家人)'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요리토모는 조정을 무시하고 고케닌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사들에게 영지와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183년, 조정으로부터 동국(東国) 지배를 용인받고 수호(守護)·지두(地頭) 임명권을 공인받으면서, 고케닌 영지의 안도와 관직 수여 같은 행위가 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처럼 겐페이 전쟁의 소란 이후, 동국을 중심으로 한 어은과 봉공이 조정의 공인을 받으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어은과 봉공의 희생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이 어은과 봉공 체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고케닌 간의 윈윈 관계를 기반으로 하며, 어느 한쪽이라도 이 메커니즘에서 이익을 느끼지 못하면 양자의 관계는 금방 무너집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몽골 침입(원구)으로 멸망하게 된 것도, 그 원인이 된 어은과 봉공이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이 어은과 봉공의 혜택을 실감할 수 있도록 고케닌 간의 관계, 인품, 약점 등을 항상 파악하며 고케닌의 불만을 없애는 데 힘썼습니다. 그리고 이 체제를 방해하는 자는 설령 아군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은과 봉공의 희생자가 바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였습니다.

요시츠네는 형인 요리토모가 고케닌을 규합하는 와중에도 제멋대로 조정에 출사했습니다. 그러나 어은과 봉공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고케닌이 요리토모 외의 인물에게 복무해서는 안 됩니다. 두 군주를 섬기면 고케닌이 느끼는 어은과 봉공의 혜택이 줄어들고, 고케닌이 배신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요리토모의 동생인 요시츠네는 스스로 가마쿠라 막부 체제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행위를 주도한 셈입니다.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막부 붕괴의 원인을 더 이상 남기지 않기 위해 1189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토벌하는 오슈 합전(奥州合戦)을 일으켰습니다.

가마쿠라도노가 고케닌에게 내리는 어은의 구체적 예

어은이란 가마쿠라도노, 즉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이 고케닌에게 내리는 포상을 의미합니다.

가마쿠라도노가 고케닌에게 주는 것은 두 가지 유형입니다.

  1. 본령안도(本領安堵): 쇼군이 고케닌의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의 지배권을 보증한다.
  2. 신은급여(新恩給与): 고케닌에게 새로운 영지를 하사한다.

그 방법은 고케닌에게 토지를 직접 주는 방식이 아니라, 일정한 토지의 관리를 맡기는 지두(地頭)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 본령안도: 고케닌이 오랫동안 살아온 지역의 지두에 임명
  • 신은급여: 고케닌을 새 영지의 지두에 임명

여기서 영지 관리권(임명)이 핵심입니다. 지두직에서 해임되면 그저 평범한 무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두 임명권은 쇼군(가마쿠라도노)이 독점적으로 소유했기 때문에, 고케닌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쇼군에게 봉공해야만 했습니다.

고케닌이 가마쿠라도노에 바치는 봉공

봉공이란 어은에 대한 보답으로 쇼군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은과 봉공이 겐페이 전쟁의 난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봉공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함께 싸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헤이시가 멸망하고 겐지의 세상이 도래한 후, 봉공은 세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1. 전쟁 시 군역(軍役)
  2. 교토 대번역(京都大番役)
  3. 가마쿠라 대번역(鎌倉大番役)

전쟁 시 군역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생전에는 큰 전투가 많지 않았지만, 그 사후에는 가마쿠라 막부를 둘러싸고 조큐의 난(承久の乱)과 몽골 침입(원구)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고케닌들은 가마쿠라 막부를 위해 싸웠습니다.

교토 대번역

큰 전쟁이 없을 때의 주된 임무였습니다. 주요 임무는 천황과 상황의 어소(御所)를 경비하는 것으로, 간토에서 교토로 올라가 6개월 동안 어소를 호위·경비했습니다. 이 임무는 고케닌에게 매우 큰 부담이었고,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는 3개월로 단축되었습니다.

가마쿠라 대번역

가마쿠라 막부를 경비하는 임무입니다. 교토 대번역의 가마쿠라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제의 시작

가마쿠라 시대의 어은과 봉공처럼 사람들이 토지를 매개로 주종 관계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은 역사학에서 봉건제(封建制)라고도 불립니다.

봉건제와 어은·봉공은 '어은과 봉공 = 봉건제의 하나'라는 관계입니다. 세계에는 어은·봉공과는 다른 방식으로 봉건제를 채택한 국가와 지역이 많습니다.

어은과 봉공을 기반으로 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과 함께 일본에서 봉건제가 시작되었고, 이는 에도 시대까지 오랫동안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