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나라 시대에 승려가 늘어난 이유와 간진 화상이 일본에 온 이유

지난 글에서 다룬 '승려가 일본에 온 이유'에 이어, 이번에는 특히 간진(鑑眞) 화상에게 초점을 맞춰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주제인 '승려의 수가 늘어난 이유'에는 간진이 일본에 온 이유에 대한 단서가 숨겨져 있을 듯하여, 두 가지를 함께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승려 수가 늘어난 일본의 상황

710년 수도가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되었지만, 이 무렵 천황의 거처인 궁성은 어느 정도 완비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헤이조쿄를 조성하는 과정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인력과 물자가 끊임없이 운송되어야 했습니다.

헤이조쿄 부지는 나라 분지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 전까지는 논이 넓게 펼쳐지고 마을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평범한 농촌 지역이었습니다. 헤이조쿄 건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수도 조성에 따라 교내와 기나이 지역 백성에게 일부 세금이 면제되기도 했다고 하나, 부역(賦役), 즉 임금을 받고 제공하는 노동 자체는 고된 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천도에 필요한 것은 궁궐과 도시의 정비만이 아닙니다. 헤이조쿄로 세금을 실어 나르던 도로와 그 주변 하천의 관개·치수 같은 인프라 정비도 필수적이었고, 이런 작업들은 현지 주민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잡요(雜徭)라 불리는 노동 형태의 세금은 식량 운반까지 겹치면서 백성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도시를 만드는 일이 각 지역 사람들의 부담을 키웠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랑·도망(浮浪・逃亡)입니다(율령에 명확한 정의가 없어 해석은 다양합니다).

정부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715년에는 유랑민으로 적발될 경우 도망친 지역에서 조용조(租庸調)를 납부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도망친 곳에서는 구분전(口分田)을 받을 수 없으므로, 본거지로 돌아가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인접한 다섯 호를 하나로 묶어 범죄 예방과 도망 방지를 공동으로 책임지게 하는 말단 행정 조직 오호(五保)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개인이나 가족이 도망치면 남겨진 가족과 오호의 사람들이 세금을 대신 떠안는 구조입니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한번 도망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723년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 제정되고 743년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이 제정되기 전까지, 사찰과 신사, 귀족, 지방 호족들은 유랑민을 불러들여 토지를 확장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그곳에 나타난 것이 출가 허가 없이 집을 떠난 사람들, 이른바 사도승(私度僧)입니다. 당시 승려는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유랑민의 위장 신분으로 이용되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무렵의 불교는 민간에 대한 포교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이 스스로 출가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포교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백성들에게 불법을 설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승려의 이름이 바로 행기(行基)입니다. 나라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입니다.

한편, 당나라에서 저명한 승려를 맞이하려던 성무천황은 즉위 직후부터 많은 재난에 시달렸습니다. 즉위 다음 해인 725년에는 나라 주변에 큰 지진이 일어났고 여진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이어 732년에는 기나이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천재지변 = 나쁜 정치라는 인식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를 진정시키려면 덕망 높은 승려가 필요했기 때문에, 승려에게 위계를 수여하는 전등대법사위(傳燈大法師位) 제도 도입에 대한 요구가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저명한 스님을 초청하고자 했던 이들이 영예(榮叡)와 보조(普照)입니다. 두 일본 승려가 733년 당나라에 건너갔을 때 간진을 보고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확신했다고 전해집니다. 간진을 맞이할 당시 일본 측의 상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간진은 왜 일본에 오려 했을까?

간진은 처음으로 743년 여름 일본행에 나섰고, 이후 모두 여섯 차례의 도항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항해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으며, 간진은 여섯 번째 시도 끝에야 일본 상륙에 성공했고, 그때는 이미 눈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도 그토록 일본에 오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예와 보조의 열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나라 측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당나라에서는 그로부터 조금 뒤 안록산의 난(755년~)이 일어납니다. (양귀비 때문이라는 설도 있죠.) 간진이 그 징후를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라는 설, 아니면 당나라의 간첩이라는 설 등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문헌에서 간진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이런 설들은 상상력을 총동원한 것은 아닐까요? 사실 명확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당나라에서 불교가 천대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진의 입일(來日) 이유라는 설입니다.

애초에 중국의 3대 종교는 유교, 도교, 불교입니다. 유교는 엄밀히 말하면 종교와는 다르지만, 과거 시험의 필수 과목이었고 유교적 통치에 우선순위가 주어졌다고 여겨집니다. 나머지 둘에 대해 당나라는 건국 이래 "도존불비(道尊佛卑)", 즉 도교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중에서도 간진이 활동하던 시기의 황제 현종(玄宗)은 도교를 특히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일본행을 시도했을 때 간진은 이미 50대 중반이었습니다. 당나라에서 이미 명성을 쌓은 간진으로서는, 자국에서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국에서 불교가 외면당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불교가 중시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간진의 입일을 뒷받침했다고 생각됩니다.

정리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간진의 입일은 일본 측의 상황과 당나라 측의 상황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이 글에서 함께 언급한 행기와 더불어, 간진은 나라 시대 불교를 크게 발전시킨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성무천황 대에는 많은 재난이 계속되었습니다. 지진과 그에 따른 가뭄. 게다가 영예와 보조가 당나라에 파견된 후에도 역병(=천연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이 정치인의 탓은 아닙니다. 질병을 조사해 보면, 735년의 유행 이전에는 지난 대유행 당시 항체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나 이제는 소수가 되었고, 일본의 기온 상승이 천연두 발생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영예와 보조의 귀환 후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성무천황은 25년 넘게 재위했습니다. 천재지변이 거듭되는 가운데 반역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그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천황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