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정치 체제가 크게 변화한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그 배경에는 미국 흑선(黑船)의 내항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죠. 하지만 흑선의 도래가 곧바로 양이운동(攘夷運動)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기존 질서가 생사를 걸고 붕괴되는 상황 뒤에는 대개 "빈곤으로 인한 식량 부족"과 "생계와 관련된 탄압"이 숨어 있습니다. 흑선이 왔을 때 과연 어떤 사람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에도시대 막말의 시작
흔히 말하는 막말(幕末)은 1853년 미국이 파견한 흑선의 내항에서 비롯됩니다.
당시 서구 열강은 산업혁명으로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시장과 원자재 공급지를 찾아 식민지 획득에 나서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선과 포경선의 중간 기착지로서 일본에 주목했습니다. 1850년경 인구를 보면 청나라는 약 4억 명, 일본은 약 3,200만 명, 미국은 약 2,000만 명 수준이었습니다.
* 미국 인구는 1820년대 약 998만 명에서 1870년대 약 4,024만 명으로 증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850년 골드러시와 아일랜드 대기근(1845~1849) 당시 상당수 이민자가 유입된 것은 확실하며, 당시 인구가 2,000만 명이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서적에 따르면 뉴욕의 인구가 에도보다 적었다고 하니 합리적인 수치라 할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미국에게 청나라 시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1840년대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포경선 문제도 중요합니다. 당시 석유는 대량 운송 방법이 없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래 기름은 각종 공업 제품과 조명용 연료로 사용되는 '질 좋고' '대량 생산 가능한' 유지였습니다.
이미 아시아에 진출한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미국이 뒤처져 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최소한 일본이라도 개국시키겠다는 구상 아래 개국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가나가와조약과 일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입니다.
특히 후자는 일본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미수호통상조약의 내용은?
이 조약이 불평등조약으로 불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요코하마·나가사키·니가타·효고·시모다·하코다테(하코다테는 이후 추가) 개항(일부는 가나가와조약에서 결정)
- 에도·오사카 개시(開市)
- 자유무역
- 협정 관세율 제도(=관세 자주권이 없는 일방적인 조건)
"관세 자주권이 없다"고만 하면 그게 다일까 싶지만, 사실 당시 미국은 "국력을 키우자!"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내부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남북전쟁 직전)
- 관심 있는 청나라와의 교역을 놓치고 싶지 않음
- 곧 조약을 체결할 영국산 제품의 유통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예상됨
따라서 관세율 자체는 일본 측에 상당한 배려를 한 것으로, 일본의 수출세는 5%, 수입세는 20%로 설정되었습니다. 미국산 공업 제품 가격이 높으면 오히려 일본 국내 산업이 보호될 수 있다는 계산도 가능했죠. 실제로 이 세율로 거래하는 동안 일본 측은 수출 초과(무역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율을 "(미국이) 국력을 키운 후에는 관세를 낮추면 되니 문제없다"는 정책으로 본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영국과의 조약 체결이 더 수월하도록 어느 정도 양보하면서 우위를 점하려는 판단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이 독립전쟁의 기억이 있어 동양 국가들과 공감대가 있었다는 견해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미국은 일본에서 공업 원료인 생사(生絲)를 많이 사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습니다. 아마 이 생사 수입이야말로 미국이 노린 것이었을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본과 미국 간의 조약을 다루었지만, 불평등조약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도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세율은 미국과 동일한 수준이었습니다. 아마도 크림전쟁, 인도 대반란, 태평천국의 난 등 "일본 외부를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추가 병력을 분할하기 싫었다"는 사정이 작용했을 겁니다. 또한 이전의 일미수호통상조약에 있던 "열강과 분쟁이 발생하면 중재한다(자역)"는 조항이 역할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일본 내 생사의 수급 불균형으로 생사 가격은 다음 해 두 배로 뛰었습니다.
일본 측 오판의 원인은 무엇이었나?
생사가 부족하다고 해도 물론 생활에는 지장이 있지만, 그것이 "양이(攘夷)"를 감행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안타깝게도 막부에게는 1860년 전국적으로 한파, 태풍, 홍수가 잇달아 닥치면서 덴포 대기근에 필적할 만큼 굶주린 농민이 속출했습니다. 실제로 1860년 쌀값은 두 배로 폭등했습니다.
게다가 일미수호통상조약 이후의 또 다른 약속이 이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과 외국의 금화·은화 환율 차이입니다.
- 일본: 은화 5매 = 금화 1매 교환
- 외국: 은화 15매 = 금화 1매 교환
일본에서는 금화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낮고 은화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금화가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일본에 주재하던 외국인들은 외국 은화를 일본에 가져와 교환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막부도 이러한 금 유출을 막기 위해 금화의 순도를 낮추는 강경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판단은 큰 실수가 되었고, 화폐 가치는 급락했습니다. 결국 물가는 급등하여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한 상황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통치 계급에서 무력을 쥔 무사 계급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이 사상이 퍼지며 논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게 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1860년의 쌀값과 생사 가격 폭등이 없었다면 양이파가 그렇게까지 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