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은 일본인만큼 순위 매기기를 좋아합니다. 무엇이든 인기 순위를 매기고 싶어하는데, 그중에서도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는 특히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1위 자리는 매번 뒤집힙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링컨, 케네디, 조지 워싱턴 등이 번갈아 정상에 오르곤 하니까요.
그러나 최하위권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입니다.
평범한 엘리트의 대통령 행보

뷰캐넌의 생애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기와 겹쳐 있었습니다. 공업화된 북부와 면화 재배 중심의 남부 사이 균열은 결정적이었고, 보호무역주의냐 자유무역이냐, 노예제를 금지하느냐 존속시키느냐를 두고 미국은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뷰캐넌에게는 이런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제임스 뷰캐넌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이며, 부모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집안은 부유했지만 안타깝게도 형제들은 모두 요절했습니다.
성장한 뷰캐넌은 펜실베이니아의 디킨슨 칼리지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소속 정당은 연방당이었으며, 1812년 전쟁(영미전쟁)에도 참여했습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주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앤드류 잭슨 내각에서는 주러시아 공사로, 폴크 내각에서는 국무장관으로 활동하며 외교 경력을 쌓았습니다.
이 무렵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약혼녀가 돌연 세상을 떠나면서 뷰캐넌은 평생 독신을 지켰고, 미국 역사상 유일한 미혼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폴크 대통령 이후에는 주영국 대사를 지냈으며, 1856년 미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모든 재난이 겹친 임기
개인으로서의 제임스 뷰캐넌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유능한 축에 속했을지도 모릅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루이 16세가 개인적으로는 무능하지 않았음에도 역사상 가장 무능한 프랑스 국왕으로 기록된 것처럼, 뷰캐넌도 시대의 불운이 겹치면서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남북전쟁을 불러온 원흉으로 지목되기 때문입니다.
불황의 발단은 크림 전쟁이었습니다.
원래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이었지만, 프랑스와 영국이 개입하면서 유럽 시장의 밀가루 값이 폭등했고, 이것이 세계적인 불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에 남은 '1857년 세계 공황'입니다. 미국 역시 이 충격에 크게 휘청였고, 뷰캐넌은 끝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물론 뷰캐넌 탓만은 아닙니다. 미국은 철도 건설 등 과잉 자본 투자로 성장의 대가를 치르던 중이었고, 골드러시의 종언과 금융회사들의 연쇄 파산까지 겹쳤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뷰캐넌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남북의 분열을 막지 못했습니다.
뷰캐넌 본인은 민주당 소속으로, 기본적으로 남부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찬성할지 반대할지 모호하게 우유부단하기만 하다가, 결국 1860년 남부 여러 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새로운 '아메리카 남부연합'을 수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뷰캐넌은 줄곧 북과 남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최악의 형태인 내전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지만, 미국인 개개인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남북전쟁이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미국인의 사망률은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 거의 10배에 달했습니다.
남북전쟁이 제임스 뷰캐넌 혼자서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그 원인을 묻는다면 뷰캐넌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뷰캐넌에게는 혼란을 진정시킬 힘이 없었습니다. 어떤 각도에서 평가하더라도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이 평가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