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미국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최초의 대통령

세계사에 꽤 밝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솔직히 '마틴 밴 뷰런'이라는 이름은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접했다.

미국 독립전쟁부터 남북전쟁에 이르는 시기를 흔히 '잭슨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앤드류 잭슨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사이에 있었던 대통령들은 두고두고 말할 만한 업적이 빈약한 편이다. 잭슨이 그어 놓은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통령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시기에는 흑인 노예의 수는 계속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네덜란드계 미국인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이라는 이름을 보면 네덜란드계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축구팬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AC 밀란 전성기의 스트라이커였던 '마르코 판 바스텐', 골키퍼 '에드빈 판 데르 사르',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처럼 이름에 '반(van)'이 들어가는 것이 네덜란드식 이름의 공통점이다.

제7대 앤드류 잭슨까지 미국 대통령은 모두 영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러니까 마틴 밴 뷰런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비(非)영국계 대통령인 셈이다.

마틴 밴 뷰런은 미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선조들은 무려 5대 전에 미국으로 건너와 아주 초기 정착민 가문을 이루었다.

가정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틴 밴 뷰런도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모국어는 네덜란드어였으며, 덕분에 그는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기록도 갖게 되었다.

뉴욕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수의 흑인 노예를 거느린 소규모 농장을 운영했으며 토머스 제퍼슨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의 지지자였다.

집안은 크게 부유하지 않았고, 마틴 밴 뷰런 본인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초등 교육을 마친 뒤 프랜시스 실베스터라는 연방 판사 밑에서 약 6년간 법률을 공부했고, 1803년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공직 생활을 차곡차곡 쌓아 1812년 뉴욕주 의회 의원, 1821년 연방 상원의원, 1828년 뉴욕 주지사에 올랐다.

앤드류 잭슨을 강력하게 지지한 공로로 잭슨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이 되었고, 1832년에는 부통령, 이어 1837년에는 미국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 제8대 대통령

미국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최초의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은 대통령으로서 인기가 매우 낮았다. 재임 중 경제 공황이 닥쳤는데도 그는 왕족처럼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고, 위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방관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물론 그가 게으른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심지어 훗날 대공황 때조차 정부는 처음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자유방임 경제'가 '수정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인데, 이 시점에는 케인스조차 태어나지 않았다.

즉, 이 시대의 경제정책은 어디까지나 '레세페르(Laissez-faire, 자유방임)'가 기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잭슨의 노선을 물려받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을 한층 강화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인디언 강제 이주는 행복한 결과를 가져왔다. 체로키족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주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 발언으로도 그는 유명하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적어도 4,000명 이상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이들이 척박한 땅으로 내몰렸다.

변호사 출신인데도 그의 사전에는 '인권'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모양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치면서 그는 1840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만다.

말년에 남긴 업적이라면 노예 해방을 추진한 링컨을 지지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마틴 밴 뷰런은 1862년 세상을 떠났으며, 사인은 폐렴이었다.

마틴 밴 뷰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사실 마틴 밴 뷰런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드물게 국무장관, 부통령, 대통령 세 자리를 모두 거친 인물이다. 이 기록을 가진 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과 단 둘뿐이며, 부통령 출신으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사례는 약 150년 뒤 조지 H. W. 부시에 이르러서야 나왔다.

하지만 이 화려한 경력이 대통령으로서의 실적을 좌우하지는 못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남부의 면화 생산량은 늘었고, 그 이면에는 흑인 노예 수의 증가가 있었다. 이 시기의 다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원주민에 대한 박해는 극심했으며, 그는 국가 분열의 불씨를 방치해 온 대통령이기도 했다.

마틴 밴 뷰런은 역대급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말년에 노예 해방을 추구했던 링컨을 지지했다는 점 하나는,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구원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