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콜럼버스와 신대륙 항해의 역사

유럽인의 도착과 '지리상의 발견'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은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의 일부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경제적, 과학적, 정치적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유럽은 향신료 산지로 불리는 '향신료 제도'에 직접 닿을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했습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 기존 동방 무역로가 차단되면서 이러한 열망은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일련의 기술적 발전이 대양 항해를 현실화했습니다. 키(舵)의 도입, 나침반과 아스트롤라베의 활용, 그리고 카라벨선과 대형 선박의 발명이 대표적입니다.

'레콩키스타(영토 재정복 운동)'를 마무리해 가던 포르투갈은 해외 팽창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4세기 말 사그레스 항해학교를 설립하여 항해술 발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비교적 한발 늦게 출발한 카스티야 역시 카나리아 제도 편입에 착수하며 대서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콜럼버스와 신대륙 항해의 역사

향신료 무역로

콜럼버스의 서항 계획과 포르투갈의 거절

그라나다 전쟁이 끝난 뒤, 가톨릭 군주(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마침내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달하려는 계획에 주목할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은 이미 알카소바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계획은 '서쪽으로 항해해 인도에 도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포르투갈 국왕에게 안을 제출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콜럼버스는 지구 직경을 약 3만 킬로미터로 가정했지만, 실제로는 약 4만 킬로미터입니다.
-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1,125마일로 계산했지만, 실제로는 2,495마일(토스카넬리 지도 기준)에 달합니다.
-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를 남쪽으로 우회해 아시아에 도달하는 항로 개척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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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넬리의 지도

산타페 협약과 첫 번째 항해

포르투갈의 거절 이후 콜럼버스는 가톨릭 군주들에게 계획을 다시 제안했습니다. 궁정 학자들이 그의 계산 오류를 확인하며 반대 의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군주들은 산타페 협약(Capitulaciones de Santa Fe)에 서명했습니다. 이 계약에 따라 콜럼버스는 제독, 부왕, 그리고 발견될 땅의 총독 칭호를 받았으며, 사업 이익의 10%를 몫으로 얻기로 했습니다.

핀타호, 니냐호, 산타마리아호 세 척으로 구성된 탐사대는 1492년 8월 3일 팔로스 항을 출발했습니다.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에 잠시 머문 뒤 대서양 횡단에 나섰고, 드디어 1492년 10월 12일 육지를 발견하여 구아나하니 섬에 도달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3년 1월에 귀환했으며, 같은 해 4월 바르셀로나에서 가톨릭 군주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첫 항해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찾던 향신료와 부는 발견되지 않았고, 풍경 역시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동방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토마토, 옥수수, 진주 등 수익성 있는 물산을 확인했고, 나아가 원주민을 노예로 삼을 가능성까지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교황의 중재와 토르데시야스 조약

같은 해, 신대륙 문제를 둘러싼 포르투갈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자 교황의 중재가 이루어졌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인터 카테라(Inter Caetera)' 교서를 반포하여, 아조레스 제도에서 서쪽 100리그 지점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기독교 군주가 소유하지 않은 모든 발견된 땅을 카스티야에 귀속시켰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결국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리그 떨어진 자오선을 기준으로 양측의 세력권을 나누었는데, 그 기준선의 서쪽은 카스티야,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향권이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콜럼버스와 신대륙 항해의 역사

후속 항해와 콜럼버스의 최후

첫 항해 이후에도 콜럼버스는 세 차례의 항해를 더 이어갔습니다. 두 번째 항해에서는 대앤틸리스 제도(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를, 세 번째 항해에서는 오리노코 강 하구와 마르가리타 섬을, 네 번째 항해에서는 온두라스와 아메리카 연안을 남쪽 통로를 찾으며 탐사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항해를 마친 뒤, 콜럼버스는 자신이 하나의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1506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빈곤과 잊혀짐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 열강에 의해 체계적으로 탐사되고 식민지화되는 격변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출처: historiaymas